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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산 26-1 묵촌마을 뒷산 남도장군 이방언 묘소를 찾았다. 이방언(李邦彦, 1838-1895)은 장흥 용산 묵촌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자방(子邦), 호는 방언(芳彦)이고, 본명은 이민석(李民錫)이다. 대제학(大提學) 이문화(李文和)의 후손이며, 부친은 장흥향교 용산리 향약 청원계의 도정 이중길(李重吉)이다. 이방언은 유학자 고산(鼓山) 임헌회(林憲晦)의 제자로,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과 동문수학하였다. 그러나 1890년 무렵 주자학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천도에 합치하는 수행을 통해 새 세상을 이룩하려는 동학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동학에 입교, 장흥 어선접의 접주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방언은 학덕을 겸비한 명망가로 평소 흉년이 들었을 때도 중세(重稅)와 관리들의 횡포가 계속되자 장흥군수를 방문하여 감세를 진정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전라감사를 찾아가 담판 끝에 그의 출신지인 남상면 일대의 감세를 받아냈다는 일화가 있다. 동학에 입도한 후 포교활동을 하였고, 1893년 보은집회에도 참가하였다. 1894년 3월 전봉준의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4월 23일 장성 황룡촌전투에 참가, 장태를 사용하여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전주화약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폐정개혁 활동에 종사하다가 9월에 새로 부임한 장흥부사가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활동을 전개하자 다시 봉기하였다. 12월 4일 벽사역, 12월 5일에 장흥부를 점령하였으며, 이어 강진현과 병영마저 점령하였다. 그러나 12월 15일 석대들전투에서 일본군 및 관군에게 패해 12월 24일에 체포되었다.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1895년 4월 27일 고향 장흥에서 다시 체포되어 장대에서 처형당했다. 묘비는 1982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