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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학살추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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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朴東羲)는 옥천에서는 3월 16일에 하계리 류석구(柳錫九)의 집 담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벽보가 붙으면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청산면에서는 3월 26일 읍내에서 수백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월 2일 장날 오후 9시경에는 고한주(高漢周) 등의 주도로 1,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가 있었다. 박동희·김철수(金轍洙) 등은 시장에 모인 장꾼들과 면 소재지 일대를 활보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위협을 느끼고 헌병주재소로 피신한 일본인을 보호하면서 주재소를 지키다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군중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56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나,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3일 오전 1시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도 오후 8시경부터 수천 명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박동희는 1919년 4월 청산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태(笞) 60도(度)의 태형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