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age


2page

이석(李錫)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896년 을미사변으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거의(擧義)했다는 소식을 듣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총을 메고 의병에 참가했으나 의진이 해산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05년 겨울에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 등이 경주의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擧義)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지를 이끌고 그 의병진에 가담하였는데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된 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으로 발탁되었다. 1907년에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 영덕(盈德) 등지에서 의려(義旅)를 소모하다가 남석문은 체포당하여 처형되었으며 이 석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또한 정용기의병대장이 입암(立岩)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석은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대장마저 청하(淸河)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니 의병진은 그 주장(主將)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연소함을 들어 장위(將位)에 오르지 않고 주장(主將)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후에 장기(長 )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군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蔚山)을 향해 진군하던 중 복병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훗일의 재기(再起)를 기약하고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내려가 삼유산(三踰山)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고 있다가 1909년 2월에 적에게 체포되었다.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하여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