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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나이 20에 백가시서를 두루 섭렵하고 면암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참뜻을 얻어 명성이 높아 궁궐에 이르니, 1902년 혜민원 주사에 제수되고 이어 시종관 정3품 태의원 전의로 특별히 승진하여 성실하고 부지런히 직무를 지키는 바, 1905년 늑약의 치욕으로 한말의 비운을 맞게 된 공은 관직을 버리고 동문인 고석진, 고제만 등과 면암선생을 알현하고 국난을 막고자 맹서를 하고 의병을 일으킬 계획과 군자금 조달에 힘을 다해서 주선하여 고예진에게 경비를 주어 포고문 수 천매를 친쇄하여 전국에 전파케 하는 한편 다음해 윤4월에 면암옹과 함께 수천 명의 의병을 일으켜 순창, 곡성, 장성, 태인 등의 지역에서 치열한 교전을 하다가 면암옹은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병이 지극히 위독하여 공이 들어가 모시고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구원하여 치료에 정성을 다하고 돌아가시자 초상을 돕고 고국으로 돌아와 장사지냄에 일본정부가 조의금을 전하니 세 번 물리쳐 받지 않고 육로로 상여를 매고 관을 운반할 때 일본 오랑캐가 민심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삼엄하게 저지하고 기차로 운구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통렬한 언변으로 설득하여 배격하고 육로로 노성(논산의 옛 지명) 무동산에 안장하니 세상 사람들이 참된 의사라고 칭찬하여 감탄하였다. 또한 문인들과 묻고 모색하여 문집을 발간해 내고 태산사를 창건하여 타령(신주를 사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받듦)케 하셨다. 1918년 3월 28일 69세로 졸하니 성내면 신흥리 우측 기슭 간좌의 언덕에 안장하다. 배위는 숙부인 청주 한씨 기영의 딸이니 묘는 합장하였다. 2남 1녀를 낳으니 장남 형숙은 태학교관이고, 차남은 한숙이요, 의성 김종락은 사위다. 아! 공은 경술(경서에 관한 학술) 문장과 굳세고 의연한 지조로 국난에 의로 달려가서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니 그 위대한 공훈과 우뚝한 절개는 추상 같이 늠름하도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전주교대 최근무 교수의 대마도일기 여구논문에 공의 의적이 더욱 밝혀졌다. 증손 영선이 묘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대대로 사귄 정이 중하여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공의 애국충정을 가상히 여기면서 한 평생 행실의 대략을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