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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희는 전북 고창(高敞) 출신으로서 일찍이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군자금에 충당시킬 목적으로 현금을 준비해 두었다가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06년 4월 면암이 의진의 거점을 태인(泰仁) 일대로 확정하고 남하할 때 16일에 미리 종성리(宗聖里)에 당도하였다가 최학엽(崔學燁)·고석진(高石鎭)·고제만(高濟萬) 등과 더불어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면암은 일찍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일본의 주목을 받아 왔으므로 곧 이들의 의병운동은 관군과 일병의 추격을 받아 끝내 면암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 등은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고 말았다. 본래 면암은 노환의 지병을 갖고 있었으므로 곧 득병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연락을 받은 노병희는 12월에 한의(漢醫)의 자격으로 대마도로 가서 치료에 전력을 다하다 끝내 별세하자 호상(護喪)으로 참가하여 유해를 본국으로 반장(返葬)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