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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858년 9월14일 당시 이곳 무장군 동음치면 당산마을에서 중시조 장흥백중 筵(연)의 21세손이요 진사 자신의 15세손으로 부 제량 모 청주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에 능하였고 정훈으로 가통을 이으매 대대로 선비요 효우의절이 행의사표였다. 이립의 고비에 이르러 그 웅지를 펴내니 제세요 구민이었다.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포에 입도한 공은 민초의 선구자 전봉준휘하에서 일촌지기 송문수누 문덕중과 더불어 구적산하 당산골에서 농민군양성의 간재들도 맡았다. 갑오봉기때 송문수의 부장으로 영광무장에서 출전하였다가 체포되어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었으나 귀향길에 고부에서 다시 잡혀 무장으로 압송 이도란정죄목으로 3월 27일 사자등 총살형장에서 세 동지와 함께 산화함에 인근지덕으로 겨우 시신을 거두어 두암산하 갑좌 경향에 죽렴장하니 오호통재라 반봉건 반외세로 보국안민의 대의를 펴내다가 혁명좌절의 비탄과 비분강개의 한을 품은채 끝내 반역의 누명을 쓰고 구천을 해맸는데 갑오거사후 백준년에 이른 오늘에사 역사의 재평가리에 통한의 신원을 이루게 됨에 만시지탄이나 향리의 후진들이 공의 높은 절의와 유덕을 추모하여 그 뜻을 비각한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에 사승을 두고 중로들과 후손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