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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한을 품은 체 뜻을 못 이루었고, 정미년(1907) 12월 5일 동지 2백여 명을 모집하여 공의 통솔하에 남도로 행군하여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곧바로 정읍 입암산성에 이르러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대파하고, 다음해인 무신년(1908) 3월 흥덕 용병암 작전과 동년 5월 소노령 전투에서 적군을 다수 총살하였고, 같은 해 11월 7일 후포 일본 헌병 병참소를 불로 공격하여 총검탄환 등을 다수 노획하였다. 이와 같이 군의 형세가 당당할 즈음 기유년(1909) 6월 23일 동지 7인 등과 소성면 두암마을에서 잠복작전을 모의하던 중 애석하게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7인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 하여 당일 석방되고, 공은 전남 장성 일본 헌병 분견소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힘주어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남아의 정의는 충효라, 예의 동방 우리 강토를 무참히 짓밟는 섬 오랑캐 네놈들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손발을 묶이니 불충불효함이 이에서 비할 바가 없다."라고 한탄한 소리에 원수의 총탄에 쓰러지시니 기유년 6월 30일, 23세의 고귀한 생명을 받치셨다. 장하구나, 의사여! 우뚝한 충절 설상 같이 늠름하다. 나라 잃은 우리민족 서러움이 어떻던가? 의사의 애국정신 누구나 경앙의 눈물 금치 못함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주는 감명은 더욱 크도다. 해방 후 계사년(1953) 2월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에 건립된 호남순국열사비에 기재되엇으나, 본군에서는 광복 19년을 맞이한 오늘에까지 의사의 혁혁한 사적을 포양(기리고 장려함)치 못했음이 매우 유감이다. 내가 고을에 부임한 뒤로 유림 여러분들의 호소장과 각층 인사들의 심의하에 추모비를 건립함에 즈음하여 전교 김기택 동지와 함께 사적을 간략히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배위 김해 김씨는 정절을 온전히 지키고, 아들 원상은 각별희 유풍을 지키며 손자 광천, 광운, 광룡, 광학, 광배, 광균 모두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책을 읽으니 의사의 끼친 음덕이 풍성하도다. 단기 4296년 6월 일 고창군수 신상우는 삼가 짓는다. 월성 김기택은 삼가 기술한다. 상락 김정회는 삼가 쓴다. - 자료 출처 : 고창의 의병운동과 독립운동가 (사)고창문화연구회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