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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부안 동학농민혁명과 부안 관아 터 조선 시대 부안 관아는 현감이 사무를 보는 동헌[東軒.패훈당(佩訓堂)]이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에, 그 서쪽에는 현감의 숙소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관아 출입문으로 2층의 진석루(鎭石樓)가 있었고, 그 앞 좌측 너럭바위에 '주림옥천(珠林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의 여덟 글자가 새겨 있었다. 지금의 부안군청 자리에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부르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 백산대회 [3, 26/5. 1]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부안읍 모산리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합류하여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먼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라 감영에서 부안 현감에게 지시하여 모집한 장정(壯丁)들을 해산시켰다. 그 뒤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 관아에 머물렀으며, 관아 뒤편에 있는 성황산에 주둔하였다. 부안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4월 7일[양력 5.11] 황토현 전투의 주력군으로 참여하여 승리하였고, 황토현 전승일은 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관아는 동학농민군과 관원이 공존하며 질서를 유지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포병(砲兵) 4,000여 명을 인솔하여 부안 성안으로 들이닥쳐 군수 이철화 씨를 잡아 꿇어 앉히고 칼을 빼 목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형[김낙철]이 진(陳)을 치고 들이닥쳐서 손화중에게 말하기를, "네 선산(先山)이 이 성 밖에 있으니, 나의 성주(城主)가 바로 너의 성주이다. 성주는 부모와 마찬가지인데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라고 하니, 손화중도 역시 감화가 되어 [부안 현감] 이철화 씨가 참혹한 화를 면하였다." 『金洛鳳履歷』 甲午四月初三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