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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오호라, 공이시여! 민족적인 비참으로 경술국치의 큰 변고를 당하자 나이 24세의 청년학도로서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고종황제 인산에 참여하여 3.1운동에 가담하고 즉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동지 수십 명을 규합하여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수십 장을 비밀리에 준비하여 무장시장이 서는 날인 3월 15일에 여러 군중 앞에서 선언문을 선독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면서 가두행진을 하다가 일본 군인에게 체포되어 1년 반의 징역판결을 불복하고 서울고등법원까지 항고하면서 "조선인이 조선독립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본연의 일인데 이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하면서 서대문 감옥에서 투쟁하다가 잔학한 고문에 왼편 어깨의 절식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아니하니 결국 잔혹하게 살해하여 암매장한 것을 당시 변호사인 맏형 영휘의 죽음을 무릅쓴 노력으로 시신을 염습하여 수원, 천안, 공주 등 여러 곳의 독립군 동지들의 교체적인 운상으로 고향 산 공동묘지에 장레를 지냈다가 다시 일본 군인의 감시를 피하여 선산 오른편인 이곳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후인의 정성이 미약하여 1977년에야 드러나 빛을 보게 되어 대통령표창을 받고, 이번 국비로 석의를 갖추고 묘역을 정화할 때 면장 진기상과 족질 은수가 사실의 기록을 청하니, 독립운동사에 대해 촌로의 구전을 참조하여 대략을 거론하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되, "천하를 다 주고도 바꾸지 못할 단 한 번의 생명, 엄중하고도 존귀한 단 하나뿐인 생명, 이것을 주저없이 그 아까운 생명, 3분의 1도 누리지 못한 청춘을 조국의 제단 앞에 비치신 그 동기는 무엇인가? 그 의와 열 그것 때문에 이 민족의 생명이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요, 그 기백 그 숙계가 맥맥히 흘러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