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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전유인은 출산하지 않았다. 고종 17년 1880 경진 10월 15일 무장면 백양마을에서 태어난 의병장은 아명은 채열이고 자는 응호이니 지혜와 용력이 뛰었는가 하면 강개한 큰 뜻이 있었다. 효제돈목의 학문과 한의술 또는 무기를 제조하는 재능까지 겸비한 공은 섬나라 왜적이 침범한 한말을 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정미 1907년에 기삼연과 참군하여 많은 전략을 세웠다. 무신 1908년에 기공이 장렬하게 순절한 뒤에 다시 이대국의 의막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엇는데 얼마 안 되어 이대장이 또 전사하자 군중의 추대로 대장이 된 공은 드디어 완전무장을 갖춘 의병 수백을 인솔하고 담양 추월산, 나주, 함평 성문내, 영광과 고창 고성산, 무장, 부안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왜군 수비대와 접전하면서 수백급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우는 가하면 고문경 유장렬 김홍일 이태섭 최경환 등과 군자금을 조달하면서 6~7년 간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왜적에게 붙잡혔다. 공은 광주법원 전주지청에서 15년형을 받았고 대구법원에서 무기를 받아 계속된 고문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꽃다운 37세로 병진 양 4월 22일 순절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은 한말 영광의병사 사료집 한국독립사와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홍농면 유림들이 올린 천장 이외 많은 추천서가 있어 1980년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건국훈장 국민장이 내렸는가 하면 1993년에는 김영상 대통령의 국가유공자증이 수여되었다. 배유인은 전주 이강연의 따님으로 경진생이며 여사다운 기질이 있어 왜경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심한 고문 끝에 마침내 정사 10월 14일에 삶을 마치었다. 2남 1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재윤 재연이고 사위는 창원 황규현이다. 전차대대장인 인후와 정후 동환과 서 김원용 김영규 조광환 홍동의 처는 큰아들이 낳았고 희후와 덕후와 박진용 처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대원 대승 대관 대식 대일 성일 성현 성민 정민 민용 등이며 증손녀는 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