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page


101page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아버지 휘 형숙은 태안학교 교관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세상을 살아감에 청렴결백하고 정직하였다. 어머니 숙인은 청도 김씨 수남의 딸로 부인의 덕을 잘 갖추었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공은 맏아들로 1890년 갑오 11월 6일에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재질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고 성품 또한 배우기를 좋아했다. 말하는 기량이 월등하며 지극한 효성을 타고나서 일찍부터 선조의 가르침으로 할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구국 통한의 유지를 승계하셔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조달하는 한편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민세 안재홍, 근촌 백관수 등 여러 선생과 나이 겨우 26세의 약관으로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 및 인천 미두사건, 민족사상고취 등 수 많은 일제 침략에 과감히 항쟁하셨다. 1921년 일본 오랑캐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시는 하나의 마음으로 곧은 절개를 지킨 독립운동가이시다. 을유년 해방을 맞아 조국건설을 뜻하던 사업을 진력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1950년 8월 27일 졸하니 향년 59세이었다. 공의 애국충절에 대하여 많은 국민들이 흠모하여 기리고, 1961년 3.1절 날 성내면 운산에 대한독립운동사적비를 세우고 198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아! 조국광복과 조부님의 망국의 한이었던 유지를 이루기 위하여 일본에 저항하여 의롭게 일어나시니 그 충성과 효도의 두 가지 절개는 청사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의사로다. 공의 배우는 울산 김씨 철수의 딸과 전주 이씨 치수의 딸과 흥성 장씨 순오의 딸이다. 자식 3남 5녀는 명 아래에 기록하며, 자손은 번성하고 또 모두 선행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더니 지금 장차 돌을 깎아 묘도를 장식하면서 공의 맏아들 영선은 동문수학한 벗으로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여 굳게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마침내 조선민족운동연감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대략 글을 지어 그의 무덤에 표지하노라. 서기 1984년 갑자 8월 15일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최근무는 삼가 짓는다. 광복회 전북지회 회장 노환은 삼가 쓴다. - 자료 출처 : 고창의 의병운동과 독립운동가 (사)고창문화연구회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