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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은 당시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 산하 불갑지구 사령부(사령관 박정현)가 들어서 있었다. 불갑산 남서부줄기에 해당하는 모악산 용천사에 불갑지구당(위원장 김용우) 본부가 설치됐고, 무장 투쟁을 위한 훈련장도 마련됐다. 또 1951년 2월까지 '불갑산 빨치산'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할 만큼 세도 강했다. 이들은 함평, 영광, 장성, 무안, 목포 등 전남 서북권을 관할하며 군경과 끈질기게 대치했다. 당초 모악산으로 불린 불갑산은 백제 시대 불갑사가 들어서면서 그 지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용천사 부근(함평)은 여전히 모악산으로 불리며 함평과 영광을 구분 짓는다. 불갑산은 기껏해야 높이가 516미터에 불과하다. 1000미터가 넘는 산들과 비교하면 크기나 위세가 초라하다. 그러나 '산들의 어머니'답게 월악산(해발 167미터), 군유산(해발 400미터), 장암산(해발 482미터) 등 주변의 낮은 산을 거느리며 함평과 영광의 경계에 우뚝 서있다. 여기에 여러 능선과 봉우리가 얽혀있어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하며, 북으로는 노령산맥과 연결돼 있어 보급 투쟁이나 게릴라전이 용이했다. 이 지역 좌익들이 불갑산을 본거지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군인들은 불갑산 토벌 작전을 위해 마을을 소개하던 중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빨치산이 후퇴한 뒤 민간인만 남은 이곳 불갑산에서 마지막 살육전이 벌어진다.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정월대보름날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은 불갑산 구석구석을 비췄고, 용천사 뒤편 삼나무 숲은 달빛에 일렁였다. 마른 가지 아래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몸을 숨긴 채 우왕좌왕했다. 용천사 주변을 감싼 골짜기에는 군경의 총검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이곳에서 생활한 한 주민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제대로 움직일 공간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불갑산 '대보름 작전'은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를 중심으로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포중대, 수색소대 등이 참여했다. 여기에 지역 경찰 병력은 물론 청년방위대 등 우익 단체까지 동원됐다. 함평 해보·나산·신광면을 비롯해 영광 불갑·묘량면 등지에서 밀고 온 군경은 불갑산 한 덩어리를 두고 연대 작전을 폈다. 이들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숨통을 조였고, 그렇게 반군의 근거지로 향했다. 하지만 '대보름 작전'이 있기 전 빨치산은 불갑산을 벗어나 장성의 태청산(해발 583미터)으로 후퇴했고, 일부는 나주 금성산(해발 450미터)으로 숨어들었다. 불갑산에서 군경을 기다린 건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 함평에서 만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빨치산은 이미 도망갔고, 무기도 없는 일반인만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군경은 개의치 않았다. 이들 모두를 '빨갱이'로 간주하고 보이는 즉시 사살했다. 지금도 용천사 뒤편 산책로에는 그날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출처: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