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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5백년 사직이 陸沈(육침)의 비운에 잠기고 신구의 문물제도가 혼연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때 지사 인인의 한 분으로 공인된 분이 운포 양재홍공이다. 공은 일찌기 호남명문에 태어나 성품이 강항하고 의표가 외유내직하였다. 족내에 화은 재해공에게 취학하여 시례의 가업이 전승되었고 호학 입지한 바가 출중하였다. 당시 경술국치가 임박하고 해내의 명사들이 존양대의와 국권 회복을 창도하고 있을때 공은 또한 약관의 나이에 오당에서 훈목된 광간의 기상을 발휘하고자 분연이 일어나 이에 종사하였다. 회천대업에 수많은 동지를 규합하고 왜적의 침략 흉계를 초멸코자 10년 웅도를 기다리고 있던 바 적세의 팽창과 더부러 기밀이 누설됨으로서 무오5월에 노수의 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적의 검수도 산속에 있었으나 피아간의 심문시에 충군애국의 의연한 자세는 강하의 지주처럼 보였다. 공이 옥중에서 겪었던 신산고초와 태연한 거동은 적도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하고 그들의 대응책을 무색케하였다. 조차의 순간 일시라도 선철의 유훈을 흠패하고 소순의 맹자론을 일야통독함으로써 호연의 기개충만되였고 이 영향은 옥리들을 감화할 정도였다. 세월은 荏苒(임염)하여 유설의 곤욕이 10년이상 계속되였고 그 사이 양친이 또 별세하니 공은 생전에 자식의 못다함을 한스럽게 여겨 출옥후에는 사친의 도리를 닦음에 가진 정서을 기우렸다. 만년에는 시가통흠으로 칠실(漆室)의 우탄을 달래고 있던 중 홀연 와병하여 갑신 8월 23일에 서거하였으니 향년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