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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이 선생은, 서상렬(徐相烈)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충청·강원도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삼국개입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제는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였고, 마침내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실시하면서 단발령까지 강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기도 양평지방의 유인석의 제자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하여 거의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徐相烈)을 중심으로 이필희(李弼熙)·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 등이 거병하였다. 이 때 김선이는 처음부터 서상렬 의병장을 따라 다니며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제천전투에서 유인석 의진이 패한 후 유인석은 1896년 7월 11일 강원도 대화에 이르러 서상렬·이강년과 함께 평안도 방면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관서지방 이동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서상렬은 전군, 이강년은 후군으로 한 서행장정(西行長征)의 행렬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이어졌다. 서상렬은 강원도 양구(楊口) 교내(橋內)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군사를 이끌고 7월 22일 낭천(狼川:지금의 華川)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 당시 서상렬 의병장을 보좌하던 김선이도 서상렬의 시신을 붙들고 적을 꾸짖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그 고을 수령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길가에 묻었다. 그 후 석달이 지나서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반장(返將)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너무 포악하여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의거를 같이 한 사람인 채국보(蔡國輔)가 적중으로 뛰어들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반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