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page


65page

서상열 선생은, 장신(將臣) 문유(文裕)의 증손으로 인품이 강의 단결(剛毅端潔)하며 재주가 뛰어나서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뫼렌돌프(穆麟德)가 조정에 입사(入仕)하게 되자 통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판에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라고 하겠는가. 도대체 발을 붙일 땅이 어디인가" 하였다. 그때 영평(永平)의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이 학문이 깊고 덕이 높으며 바른 도를 지켜 동요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 날로 가서 뵈온바 공의 선(善)을 향하고 악을 등지는 천성으로서 더욱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에 대한 큰 판가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드디어 뜻을 높이 세워 가산을 방매하고 제천(堤川)의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계사년에 유성재가 사망하자 3년의 복상을 치렀다. 그간에 그의 학문이 높음을 알고 조정에서 선전관(宣伝官)을 제수하고 장차 통정(通政)의 계급에 올리어 세자(世子)의 사부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색하였으며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다. 1895년 고을의 군수 김익진(金益鎭)이 의복을 개혁시키고 머리를 깎게 하고자 핍박하였으나 죽음을 불사하고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여름 입암 주용규(立庵 朱庸奎)와 더불어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을 뵙고 춘추(春秋)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19일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발하자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우선 선산(先山)에 이별을 고하러 길을 떠났으나 단발령이 발하여져 길이 막혀 늦게 되돌아왔다. 동문인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과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11월 28일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서상열은 이필희(李弼熙)·오인영(吳寅泳)·배시석(裴是碩)과 더불어 단양(丹陽)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제천으로 달려갔다. 동지들이 서상열을 대장으로 추대하려 하므로 이필희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참모가 되었다. 12월 8일 단양에 이르러 관군과 접전할 때 아군을 미리 복병시켜 두었다가 좌우에서 협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승세를 타서 충주부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장졸들이 재를 넘어서 영남 각지의 의진과 합세할 것을 주장하므로 죽령(竹嶺)을 넘어서 풍기(豊基) 고을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의병을 소모하고 영월(寧越)에 당도하니 안승우(安承禹)가 제천으로부터 영서로 돌다가 군대를 거느리고 회합했다. 또한 신지수(申芝秀)도 네 고을 병정을 모집하여 왔다. 다시 행군하여 제천에 이르러 친일관료인 권숙(權潚)·서상기(徐相蘷)를 베어 죽이고, 병졸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리하며, 갑옷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본진의 뒤를 따라 계속 전진하였다.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이미 충주성에 입성해 있으므로 서상열은 "서울 부근의 적은 반드시 엄한 방비가 있을 터이니 군사를 휴식하고 군량을 적취(積聚)하여 사방의 군사가 모여드는 것을 기다려서 진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서 영남 의병을 격동시켜 호응케 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상열은 원용정(元容正)과 더불어 재를 넘어 각읍 의병을 불러모으니 남방의 여러 장수들이 호응하여 예천(醴泉)군에 모여 공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았다. 이때 회강(會剛, 榮川)·회복(會福, 安東) 등 7읍이 맹약에 참석하니 서상열은 원용정에게 맹약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첫째, 역적의 당이 되지 말 것. 둘째, 중화의 제도를 변하지 말 것. 셋째, 죽고 사는 것으로써 마음을 바꾸지 말 것. 넷째, 두 마음을 갖고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 것. 다섯째, 적을 보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 것." 3월 20일(음력) 맹세한 후 적에게 부하뇌동한 유인형(柳仁馨) 등 일곱 군수를 베고,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尙州)에 있는 왜군의 진지를 쳤다. 다른 의진은 구성이 부실하여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나, 서상열의 의진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예천으로 회군할 수 있었다. 이때 관찰사 이남규(李南奎)·이중하(李重夏)가 대구(大邱)·안동(安東)을 거점으로 의진을 집중 공격하여 왔다. 전세가 불리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제천으로 환군하였다. 다시 유인석의 명을 받고 단양으로 나아가 방비하고 있었다. 그 며칠 후 제천 의진이 무너지고 안승우·홍사구(洪思九)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분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풍기에 유진하였다가 영춘(永春)을 거쳐 정선(旌善)으로 나아가 유인석에게 황평양서(黃平兩西)로 진출하여 모군할 것을 고하였다. 도중에 여러 차례 적과 접전하였는데 6월 12일 낭천(狼川)에 이르러 적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처음부터 서상열의 시중을 들어오던 김선이(金仙伊)가 끝까지 적을 꾸짖으며 서상열을 비호하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