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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어사를 지내셨다. 때에 청조한 적신들이 침입한 왜적의 주구가 되어 을미년 명성황우 시해와 단발령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하니 선생은 분연히 의암 유인석의 의병진에 들어가 용전하였고 다시 을사년 오조약 늑결로 국운이 위급하니 공이 통분하여 또 의병을 모아 경상도 의병대장으로 왜적을 토벌하고 후에 호서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과 별진장을 거느리고 왜적을 무수히 잡았다. 위대하시다 그 일월같은 충절은 천추에 빛나고 추상같은 대의는 백세에 전하리라. 15년의 의병사를 어찌 편석에 다 새기리요 회상할지라. 이제 우리는 엄숙히 그때에 망국한을 회고컨데 매국역적들은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면 충신의사들은 멸문지환을 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은 왜적에게 잡혀가 이국만리 사지에서 수백만 동포가 원한의 죽음을 당했다 어찌 겨레의 통한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그 친일역적들은 예리한 붓끝으로 목을 베어 역사에 토죄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선열들의 윤리와 내의를 본받아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민족자존을 고수하기 위하여 이 베를 세우노니 후인들은 각골명심할찌어다. 두 선생의 묘지는 수산면 하방곡 산61번지에 계시다. 단기 4326년 계유 월일 대한민국의병정신 선양회 강성열 근지 실곡리 주민일동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