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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金酉庚)은 1919년 3월 16일부터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의 거사를 준비하던 김학배(金鶴培)·김태호(金太鎬) 등은 3월 18일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18일 오후 9시 사촌동(沙村洞) 도로 앞에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김태호는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19일에는 만세 시위가 더욱 가열화되어, 오전에는 300여 명의 군중이 사촌동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점곡주재소(點谷駐在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19일 밤 9시 무렵에는 종소리를 신호로 사촌동 도로에 사촌동·서변동(西邊洞)·동변동(東邊洞)·윤암동(尹岩洞)·송내동(松內洞) 등 부근 주민 500여 명이 밤새도록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유경은 18일 오후 9시부터 20일 오후 10시까지 점곡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김유경은 1921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유경(金裕卿)은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 중국 중앙대학 문학원에 재학 중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제3전구로 탈출하여 중국 충의구국군 및 광복군 제2지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유경(金裕卿)선생은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