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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3.1독립만세운동 고종의 장례일을 앞둔 1919년 3월 1일, 박재호 지사가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3월 26일 태극기 300장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고한주, 박동희, 김복만 등과 함께 청산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고한주, 김철수, 김인수, 박재호, 박동희, 김한주, 안병하, 안소석, 양한기 지사 등이 청산 주민과 인근 면에서 온 장꾼, 학생 등을 규합하여 벌인 시위는 오후 9시경 1,2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청산초등학교 입구에서 장터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수천 명까지 늘었으며 새벽 1시에야 해산하였다. 이어 4월 3일 밤 8시경 수천 명의 시위군중이 헌병주재소 주위에 모여 자정이 넘도록 시위 활동을 하다가 헌병주재소를 기습하여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시위가 격렬하였다. 이를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김철수 지사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체포된 김인수 지사도 고문으로 순국하는 등 50~60명이 부상을 당했다. 4월 4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시위가 중단되었다. 이후 헌병대에 주도자 수십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받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청산 독립만세운동은 충북에서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었다. 관련한 애국지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