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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89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신영우의 광무양안에 대한 연구 성과는 2007년부터 봇물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해 「광 무 양안과 진천의 사회경제 변동」(2-22), 2010년 「광무양안과 충주의 사회경제구조」(2-28), 같 은 해 「대한제국기 충북 충주의 주거 사정」(2-29) 등의 주제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는 ‘2-22’ 논 저에서 광무양안을 바탕으로 하여 한말 진천군의 사회상 복원을 시도하였다. ‘2-28’와 ‘2-2 9’ 등 2개의 논저는 광무양안을 바탕으로 한말 충주지역의 토지자본 현황과 주거환경의 열악성 을 논증하였다. 같은 해 서태원(2-30)은 의병과 일본군의 충돌이 잦았던 충주 가흥마을을 광무양안 자료 를 통해 재구성 하였고, 임용한(2-31) 한말의 독립운동가 신팔균을 배출한 진천 평산 신씨가의 경 제적 기반을 분석하였다. 같은 해 전홍식(2-32)은 현재 충주시로 포함된 지역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지방행정제 도, 경제정책과 시장구조, 사회상황과 지역주민의 생활상, 교육정책과 학교 설립, 이주 일본인의 정 착과 영향,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등 충주의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역작으로 평가 받 을 만한 글로, 향후 충주 근현대사 연구에 자주 인용될 것으로 보인다. 2011년 김시찬(2-34)은 일제의 침탈이 구체화되는 시기에 한국을 찾아 온 서양 선교사들 은 한국교회의 설립자이기 이전에 한민족의 시련을 위로해 주던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들 이 남긴 흔적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근간이 되었다며, 특히 민노아 선교사의 금 주금연 절제운동은 청주 시민들의 근대 의식을 일깨웠다고 밝혔다. 같은 해 주계운(2-35)은 논문에서 조선총독부가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 던 것은 한국 청년 대중들의 운동 역량을 약화시키는 한편 이들을 식민권력의 통제 아래 두 고 자 한 것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나아가 충청북도의 청년단 조직은 1935년 조선총독부에 서 개최된 ‘전조선 농촌진흥운동 관계자 회의’를 통해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되어 이후 전국적 으 로 청년단의 조직이 확산되는 기준이 되었다고 논증하였다. 같은 해 심재욱의 글(2-36)에 의하면 일본정부는 1990년 한국 정부에 강제동원 자료인 「 工員 名票 」를 전달하였다. 이 가운데 사가미현 명표에 따르면 1944년 11월 18일 청주군 91명, 옥천 진천군 각45명, 보은군 41명 등 총 2백22명이 동원되었다. 1944년 12월 9일은 옥천군에서 48 명, 1945년 3월 6일 청주 2명, 진천 각 1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20대 후반이 가장 많고, 대부 분 국민징용령이 확대·강화된 이후에 동원되었다고 논문은 분석하였다. 특히 ‘여성공원’의 존재 는 위안부 방식의 강제동원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같은 해 한명철(2-37)은 일제강점기 청주의 시구개정의 내용 및 사실과 그 이후의 변화 양상을 규명 하였다. 2012년 양승필(2-41)은 일제 강점기 청주를 4시기로 구분하여 시기별 변화상을 고찰하였고, 같은 해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3-42)은 일제가 작성한 필사본 『조선지지자료:충청북도편』을 책 으로 발간하였다. 김순배는 해제에서 『조선지지자료』의 학술적 가치는 한글로 표기된 고유 지 명과 그와 대응되는 한자 지명이 전국적인 수준으로 다량 수록되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2013년 김주용(2-43)의 글에 의하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은 드넓은 만주벌을 개간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