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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88 을 모두 혁파하였고, 춘추 제향에 희생과 폐백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나 아 가 이도철은 그는 명성왕후 폐위조치에 가담한 김홍집 이하 친일개화파를 원수로 생각하였 다. 그가 심문을 받을 때에 친일내각의 재판관 張博에게 눈을 부릅뜨고 꾸짖은 말에는 그의 충군 애국사상이 잘 드러난다고 밝혔다. 같은 해 이창식(2-11)은 『을미십월정의사실( 乙未十月正義事實)』, 『도정공유고(都正公遺稿)』, 『교관공효행록』, 『간첩(簡帖)』, 『이재직첩(彛齋直帖)』 등 이도철과 관련된 사료가 발견된 것은 크게 주목된다고 밝혔다. 특히 『간첩』은 흥선대원군이 충민공 아버지에게 보낸 10여 편의 서 찰이라며 제천 천남( 泉南) 충민공 집안과 고종 즉위 전후 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고 주장하였다. 그는 전시회와 함께 관주도로 이도철 기념행사를 기획해야 한다는 견해 를 내놓기도 했다. 같은 해 김성보(2-11)는 진천 이월면의 일제강점기∼해방공간의 토지소유 변동을 추적한 결 과, 구지주층은 점차 토지 지배력을 상실하여 갔지만 그외 다른 자원을 바탕으로 여전히 지역 사회의 유력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같은 해 김양식(2-13) 일제시대에 부설한 충북선의 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명하고 이에 따 른 지역 변모양상을 분석하였고, 서문석(2-14)은 충북의 경제규모가 낙후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영락한 경제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전순동(2-15)은 일제하 청년들의 활동을 다시 고찰하였고, 리진호(2-16)는 제천지역의 근대 지적 자료를 통해 당시 토지소유 양상을 규명코자 하였다. 2006년 강구율(2-17)은 논문에서 휘암 이주승은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꽃가꾸기를 즐기던 선비로 산중처사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985)과 선비의 자 존심을 일거에 훼손한 단발令 의 소식을 접한 후에 본격적으로 현실문제에 관여하게 된다고 밝 혔다. 다만 그는 가문의 장자로 조모까지 모셔야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의병활동에 적극적 으로 가담한 동생 이조승(1873∼1900)처럼 활약할 수는 없었으나 마음과 정신만은 누구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의병활동의 지원에 나섰다고 분석하였다. 같은 해 김양식(2-18)은 청주지역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분수령, 즉 근대화 기 점은 동학농민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주 근대화 기점을 최초로 공론화한 것이어 서 주목된다. 그러나 기존의 강단학계는 대체로 강화도조약을 한국사의 근대 기점으로 삼고 있 어 추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같은 해 전일현(2-19)은 진천 초평면의 광무양안(1900년)과 토지대장(1912∼1976년) 고찰을 바탕으로 양반 지주층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분석하였다. 일부는 식민지 농정에 적응하여 토지자본을 확대하였지만 일부 지주층은 쇠퇴의 길로 걷게 됐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으로 역 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07년 김재영(2-21)의 글은 전국을 단위로 한 논문이다. 충북에 대해서는 청주분사, 제천분 사 등 2곳을 서술하였다. 그는 논문에서 ‘충북은 충남보다 양반 세력이 더 강해 상대적으로 보 수성이 더 강하였다. 따라서 형평운동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찰하였다. 논문은 충 북은 도연합회 설립 문제가 다른 곳보다 늦은 1931년 9월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