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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매곡면민들이 잇달아 만세시위를 벌인 곳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61-5 일대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거리 변형 현충시설(3·1운동 의거 기념비) 1919년 4월 2일 오전 11시경 매곡면의 밤나무 양묘장 작업에 동원되었던 면민 약 100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에 몰려가 면 장 과 면사무소 직원을 설득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4월 3일 밤 면소재지인 노천리( 老川里)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 1명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오후 11시에 해산하였다. 이때 참여한 군중 수는 「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에 100명,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에 1,060명 으로 기록되었다. 4월 4일 밤 에도 매곡면 각 마 을 에서 임봉 춘(林 奉春 )·안광득(安光得 ) 등의 주도로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노천리에서는 오후 11시 다시 약 300명의 군중이 구한국기 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풍령헌병분견소에서 헌병들이 출동하여 국기를 압수하고 주도 인사 2명을 체포하고 해산을 명령했으나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들은 체포 인사를 헌병분견소로 압송했다. 이에 약 150명의 군중들은 헌병들을 뒤따라 헌 병분견소까지 가서 체포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헌병들이 석방을 거부하고 해산을 종용 하므로 만세 군중들은 4월 5일 오전 5시에 해산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은 임봉춘(林 奉春 ) 등 7명이다. 재판 결 과 남도학(南基彦 )은 징역 1년, 안광득( 安光德)과 신상희(申相熙)는 징역 1년 2개월, 장복철( 張 福喆)과 안병문(安秉文 )은 징역 1년 3개월, 안준( 安準 )은 징역 1년 4개월, 김용선( 金容善 )은 징 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8명에게 모두 애 족장을 서훈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 보면 매곡면 노천리에는 마을 남쪽에 면사무소가 위치하였고, 북동쪽 으로 옥전리에도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2008년 조사에 매곡면사무소를 방문하여 문의한 매곡면 3·1운동 만세시위지 3·1운동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