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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80 한 기술은 지역 사랑이 나라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논문은 밝혔다. 이런 점에서 이상필 의 의병기술은 지역(제천)에 대한 자긍심,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 민족자존에 대한 철저한 신 념 을 내재화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홍일교는 제천 청풍출신 우덕순에 천착하였다, 같은 해 홍일교(1-94)는 우덕순의 하얼빈 의 거 와 제천의병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였다. 따라서 그의 논문은 우덕순은 연해주에 있 는 제천의병의 후예인 것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으나 그 논거는 충분히 제시되지 못한 면이 있다 . 서상렬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증하고 있다. 2013년 구완회(1-95)는 서상렬의 생애를 다시 검 토하였다. 서상렬은 중부권을 장악하던 호좌의진이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할 즈 음, 서북 지방으로의 이동 즉 '서행( 西行 )'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했다. 이후 서상렬은 대장진의 서 행에 앞장서서 길을 열다가 낭천에서 전사함으로써, 타협 없는 의병론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고 논문은 밝혔다. 2013년 김건실(1-96)은 김정규의 역사인식은 장지연 등 한말 계몽사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 았고 일제 식민사관을 일체 배척을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3.1운동은 충북 근대사의 단골 주제이다. 김진호(1-97)가 김진봉, 황부연에 이어 세 번째로 충 북의 3.1운동을 고찰하였다. 그는 충북의 3·1운동은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약 10일간 가 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2∼30대 연령층이라고 논증하였다. 김형목(1-98) 은 초기의병, 군대해산, 교육·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을 바탕으로 한말 충북지역의 국권회복 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폈다. 같은 해 박걸순 은 「3ㆍ1봉화만세운 동과 趙東植 」(1-99),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1-110), 「아나키스트 柳子明 의 자료 현황과 새로 발굴한 手記의 성격」(2-73) 등의 주제를 발표하거나 출간하는 등 질적, 양적으로 풍성한 학문적 수확을 거뒀다. 그는 조동식이 봉화의 기능과 역사 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만세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 그는 신문 기고문, 서간문 등을 통해 정순만의 일대기를 집성하였다. 아나키스트 유자명의 새로운 수 기인 「 我的簡介 」와 「 我在中國六 十多年 」을 발견한 것은 박걸순이 그해에 이룬 또 하나의 학문적 성과였다. 유자명의 수기에 들어있는 그의 귀국 포기 사유, 아나키스트에서 공산주의자로의 사 상전환 과정 등의 내용은 자료적 가치도 적지 않다는 것의 박걸순의 견해이다. 현상과 활용 그리고 전망을 담은 논문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박경목(1-103)은 충북지역 독립 운동가와 독립운동 사적지의 보존과 활용을 제시했고, 김의환(1-105)은 제천 지역사와 의병 연 구의 현황과 과제를 발표하였다. 권순응(1-106)은 堤川義兵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시각과 전 망을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같은 해 심철기(1-107)는 정미의병의 전술 변화를 해산군인의 참여와 총기 개량에서 찾았다. 해산 군인들의 의병 참여로 의병부대는 전술상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해산군인들이 공급한 무 기들은 의병부대의 무기체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단순히 서구식 무기의 공급을 넘어 의병 의 주력무기인 화승총을 뇌관식 단발총으로 개량하는데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무기체계 의 변화는 의병전술의 변화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은 서구식 소총과 개량된 화승총으로 무장 하면서 일본군의 기습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으며, 선제적으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