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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79 3명은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백초월도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순국하였다고 논문 은 밝혔다. 같은 해 구 완회(1-85)는 한 말의 의병장 김상 태( 金 尙台 )의 생애와 항일투쟁을 검토하였다. 1908년 여름에 이강년이 체포된 후 김상태는 호좌의진을 계승했다. 혹한기에는 의병을 해산시 키고 날이 풀리면 다시 모으는 유연한 투쟁방식을 취하면서 이웃의 의병장들과 연대하면서 투 쟁했다. 연대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합치고 나뉘는 방식을 사용했다. 김상태는 이같은 전술을 통해 호좌의진, 또는 이강년의 계승자라는 정통성은 인정받게 됐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심철기(1-86)는 의병사 연구의 현황과 제천의병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1990년대는 의병 연구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연구성과 또한 풍부하였다. 2000년대 들어 의병연구는 1990년대 보다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연구되어졌으 며, 연구 관점도 의병운동 중심의 서술에서 의병부대의 내부 갈등, 의병사 저술 등 의병운동 외 적인, 그 전보다 더 다양한 시각에서 의병운동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박민영(1-87)은 옥산 이정규의 생애와 활동에 천착하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정규는 유인 석이 연해주로 망명한 후에도 계속 서울에 머물며 화서학파 의병들간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지내는 동안 이정규는 자정( 自靖) 노선을 철저하게 견지하여 제천, 충주 일대 를 전전하면서 山中 奧地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화서를 연원으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학맥과 학문 요체가 충주, 제천 일대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정규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논문은 서술하고 있다. 같은 해 권대응(1-88)은 봉화의진의 일기『( 日記)』와 의병활동을 깊이 있게 검토, 그 의의를 살 피고자 했다. 봉화의진은 창의 후 안동의진을 비롯해서 풍기·순흥·영천·예안·호좌의진 등의 의 병진과 회맹하고 태봉전투를 수행하는 등 매우 밀착하여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통문( 通文)· 관문( 關文) 등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하고, 의병진의 연합을 모색하는 등 협조체제를 유지 하며 활동하였다. 특히 봉화의진의 『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호좌의진의 소모장 서상열과 풍 기·순흥·영천의진의 활동에 관한 사료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유일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 가 매우 크다고 논문을 밝혔다. 그해 홍일교(1-89)는 禹德淳 (1876~1950)의 民族運動 과 公判鬪爭을 논증하고자 했다. 공판 기록을 통해 본 우덕순은 이토로 대표되는 일제와 선진국 일본을 구분하여 선진국 일본의 지 도는 받을 수 있으나, 일제의 지배에는 저항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저자가 다룬 것은 우덕순 의 밀정 논란 이전의 기록으로, 그 서술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2012년 박걸순(1-9 0)은「 安潚 의 현실인식과 자정 순국」(2-62)을 통해서는 안숙의 경세론과 이른바 답해(踏海) 순국 배경을 규명하였고, 그해 대작 『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국 학자료원 이름으로 펴냈다. 정민영(1-92)은 홍기문이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과학적 역사연구를 주장하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우수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같은 해 최도식(1-93)은 이상필이라는 인물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는 병환의 몸을 이끌고 『제천군지』 편찬에 남은 정열을 쏟았다. 특히 『제천군지』에서 제천의병운동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