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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78 일본군 복색만으로도 흩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취약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제천에는 호좌의 진 의 지배와 수령의 지배가 겹치는 일종의 이중권력 상태가 형성됐다는 것의 저자의 견해이다. 이태룡(1-75)은 한말 후기 충 북의병과 경술 국치 대사령을 분석, 의의를 도출하고 자 하였 다. 충북 청주군 북강내일면 신안리 출신 정춘서(鄭春瑞 )는 한봉수와 거의한 의병장급 의병으로, 경술국치 이듬해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아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 반면 한봉수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자이면서 면소 판결을 받은 것은 전국에서 유일무이하다고 밝혔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한봉수의 말년 행동을 의심하는 시선으로, 그를 둘러싼 논쟁이 완전히 겆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박정규(1-76)는 의병가사 『제천의진격가』에 대한 일고찰을 시도하였다. 의병 가사의 하나 인 「격가」는 제천의진의 대표적인 가사 문학 작품으로 설득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기능해왔다. 그러 나 「격가」의 작가는 아직까지 미상이다. 다만 그 작성 시기는 을미 12월 초3일 작성된 「격문」과 거의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그 이후라고 해도 유인석의 등단 이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 다. 김상기(1-77)는『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 陣中日誌)』를 통해 본 이강년(李 康秊 ) 의진의활동을 규명코자 하였다. 이강년은 일본군의 집중적인 추격과 공격에도 1908년 7월까지 항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 일본군 제23연대의 제천수비대와의 교전 중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고 말았다는 것이 일지 내용이다. 박걸순 은 2011년에도 다양 한 주제의 글 을 발표하였다. 그해 박걸순 은 「충 북지역 3·1운 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1-78)에서 충북의 3·1운동은 시간적으로는 늦게 일어났으나 시위양상은 매 우 격렬해 평안·경기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많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 충북 3·1운동은 후기 의병장 출신이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의 내재적 계승과 맥락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단양의 독립운동가 유적 현황과 활용 방안」(1-80)은 단양지역 독립운동가는 총 16 명으로 조사됐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각종 현양사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 申采浩 의 아나키즘 수용과 東方被壓迫民族連 帶論 」(1-81)에서 당시 <대만일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면밀히 분석, 단재의 마지막 피체 장소가 기륭우체국임을 밝혀냈다. 이는 기륭항 체포설 등 종 래 이론을 수정케 하는 중요한 성과이다. 같은 해 그는 「 一阮 洪範植 의 자결 순국과 그 遺訓 」(1- 82)에서 홍범식의 자결은 개인적 차원이 봉건적, 소국적 투쟁에서 끝나지 않고 민족적 각성과 민중의 봉기와 투쟁을 유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김형목(1-79)은 1907년 충북지역 국채보상운동에는 죄수·도둑·백정·걸인 등 사회적 으로 가장 천시되던 계층도 참여했으나 종교계는 동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흥미로운 글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한규무(1-84)는 을사조약 전후 상동청년회의 민족운동과 정순만을 고찰했고, 김광식(1-84)은 백초월의 항일운동과 일심교( 一心敎)를 분석하였다. 백처월은 3·1운 동 직후 불교계 중앙 차원의 독립운동을 추동하면서 비밀결사체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래 서 일심교를 창설하고 진관사 포교소에 사무소 개설, 강령 제정, 결사체의 확대, 결사대원의 모 집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9년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낙서사건을 주도한 것이 일제에 발각되어 일심교의 전모가 드러났다. 일심교에 관련된 80여명이 체포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