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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74 성 출신의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류연산으로 류자명의 일대기를 소설가답게 부 드 러운 문장으로 엮었다. 같은 해 박민영(1-32)은 입암 주용규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고찰하였다. 그가 지은 「격고팔 도 열읍(檄告八道列 邑 )」과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은 제천의병의 거의 명분과 활동목표를 천명하면서 일반 인민과 관리들의 지지와 원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명문으로 수많은 의병 격문 가운데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주용규는 화서문파의 의거인물 가운데 유인석과 더불어 강경한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였던 투사인 동시에, 특히 문장에 뛰어났던 학자였다고 인물평을 하였 다. 김성근(1-33)은 1895년 을미의병으로부터 1907년 군대해산당시에 지역적으로 가장 치열하 게 일군과 교전한 지역이 제천과 원주이라며 따라서 향토자료의 수집이 절실이 요청된다고 밝 혔다. 나아가 이미 발굴된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제천 의병사의 전모가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인호(1-34)는 서상열을 위정척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이를 행동으로 표출시킨 행동하 는 지식인이라고 평가하였다. 같은 해 김명섭(1-35)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을 집중적으 로 분석하였다. 그는 박열과 후미코의 반천황제 투쟁에는 허무사상이 짙게 배어 있으나, 그 내 면에는 항일 민족주의사상과 평등사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2004년 구완회(1-36)는 장충식의 삶과 의병활동을 분석하였다. 장충식은 재지세력으로서 근 왕세력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도서기론을 용납할 수 없는 척사 보수적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순 수 이념지향적인 화서학파의 투쟁노선에도 동의하기 어려워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 이다. 박인호(1-37)는 안승우의 저술과 의병활동을 고찰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은 개인적인 것을 뛰 어넘어 제천의병의 이동상황과 전황, 내부 동향에 이르기까지 제천의병 전체의 동향을 보여주 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심철기(1-38)는 유생의병장들은 척사사상을 바탕으로 한 반동학적 정서가 강했으며, 평민출신인 김백선의 경우에도 1894년 농민전쟁 당시 지평포군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 였다고 밝혔다. 그런 점에서 의병지도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의병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부 정적이었고 경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기존 이론과 다소 배치되는 면이 있는 것이어서 주목 된 다. 2005년 박걸순(1-39)은 「일제하 충북지역의 항일운동과 그 유산」이라는 글에서 충북의 항 일 운동은 식민성을 극복하고 근대 자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관 점 에서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론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에서 스스로를 배 제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창식(1-40)은 충청지방의 의병ㆍ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의 현황을 살펴보고 나아가 방향을 제 시하였다. 같은 해 구완회(1-41)는 정운경의 생애를 고찰하였다. 정운경은 화이론에 대한 집 착 하면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불행한 지식인이었다. 이같은 면은 제천의병에 참여했 던 많은 인사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의병자료를 고이 간직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