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page

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72 민운동은 청년들이 주도하였고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1995년 구완회(1-7)는 가흥전투의 전개양상과 김백선의 처형배경의 분석을 통해 왜곡된 부 분을 수정하고자 했다. 그는 김백선의 처형은 미천한 신분 때문보다는 군기확립 차원으로 봐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의 인식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다른 연구가의 반론 여부가 주 목 된다. 같은 해 이원희(1-8)는 제천지역 을미의병은 구성, 규모 등을 분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1996년 구완회(1-9)는 제천지역에 남아 있는 전기, 과도기, 후기 의병, 일제 자료 등을 심 도 있게 검토하였다. 제천의병 자료는 양반 중심이면서 그 일부는 과장되고 미화되었다는 것이 저 자의 견해이다. 같은 해 김학영(1-10)은 이원희, 심필구, 진남석 등 후손들의 구술을 통해 제 천 의병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또 박걸순(1-11)은 괴산지역의 3·1만세운동을 검토, 괴산에서 충 북 최초의 운동이 시작됐음을 논증하였다. 이밖에 박걸순(1-12)은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 쟁 을 고찰하여 의병투쟁과 3·1운동의 연결고리를 찾고자하였다. 1997년 구완회(1-13)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전투부대, 지원조직 구성 등 제천의병 편 제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또 그(1-14)는 같은 해 평소 쓴 논문을 책으로 간행하였다. 당시까지 의 그의 연구 성과가 집성된 이 책은 제천의병 체제, 지도자들, 관련 자료 등으로 지면을 구성하 였 다. 1998년 최동일(1-15)은 신간회 괴산지회를 고찰한 후, 여기에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지회 구 성원의 면면을 분석하였다. 1999년 황순홍은 제천의병의 모체가 된 것은 경기도 지평의병이 라 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산된 지평의병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제천연합의병 결성의 모체가 되 어 제천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계속 전개해 나간다고 밝혔다. 이후 지평의 안승우·이 춘 영은 제천의병에서 커다란 전과를 남기며 안보와 제천전투에서 각각 전사하고, 김백선은 가 흥 전투와 관련된 항명사건으로 유인석에 의해 처형을 당하기에 이른다고 논증하였다. 같은 해 전순동, 최동준 두 저자(1-17)는 청남학교의 변천 과정을 재구성하여 그것이 청주 지 역의 민족운동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밝히려 했다. 같은 해 노영희(1-8)는 일제강점기 청 주 군 부강면에 거주했던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의 조선체험과 사상 형성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그녀의 옥중 자서전 『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가 』를 바탕으로 시도된 저자의 글은 가네 코 후미코를‘조선을 사랑한 일본 여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괴산은 벽초 홍명희가 활동하던 곳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주목을 받는 공간이다. 2000년 강신욱(1-19)은 당시 언론보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여 1920년대 괴산지역의 청년운동 성격을 규명하였다. 박걸순은 2000년대 들어 지역사 차원의 충북의 독립운동사에 천착하면서 ‘충북’ 제목의 연 구 성과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 忠北地方 獨立運動史 의 硏究現況과 課題 」(1-20)는 그 첫번째 성과로 충북지방 독립운동의 연구 현황을 분석하여 연구의 문제점과 과제를 밝히고자 하였다. 당시 신문기사의 분석정리, 전문 연구자 양성, 연구자간 교류가 시급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같은 해 오영섭(1-21)은 을미 제천의병 참여세력의 면면을 분석하였고, 같은 해 이성우(1-22) 는 항일자료 등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결성 과정과 활동을 고찰하여 그 중심이 홍주의병이 자리 잡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괴산 출신 인물이 존재함에도 충북을 소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