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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수집터 717 D a n y a n g 단 양 조사의견 참고문헌 황학수가 6살 때부터 무관학교 입학 전까지 거주한 집이다. 비록 집터는 멸실되었으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황학수의 거주내용과 그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기념물 내지 는 안내판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황학수 공적조서」, 「황학수 공훈록」 한시준, 1998, 「몽호 황학수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31 하의 지방자치를 승인 받았으며, 중국구국군과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토일군(討日軍)으로 전 투에 참여하였다. 1928년 그는 김좌진이 겸하고 있던 군사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동년 9월에 는 3부통합(三府統合 )을 위한 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각기 의견의 차이를 보여 3부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동년 12월 혁신의회( 革新議會 )와 국민부(國民府)의 2개 단체가 새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김동삼(金東三 )을 의장으로 하는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장에 선출되었 다. 1930년 2월 상해에서 홍진( 洪震 )이 파견되어 오자 그는 이청천(李 靑天)·신숙(申肅)·이장녕 (李章寧) 등과 협의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직속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 하였다. 1932년 11월에 한국독립당 중앙당 대회에서 그는 한국독립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 다.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토벌하게 되었는데 사도하자( 四道河子), 동경성 (東京城),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전사에 빛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여 더 이상 독립군의 존립이 어려워지게 되자 그는 이청천 등과 함께 혈전을 거듭하던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남경(南京 )에서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가하였으며, 1938년 5월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 국민당의 3당통합회의가 개최되자 이청천·유동열·최동오·김학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혁명당( 民族革命黨)을 창당하는데 기여하였다. 1938년 7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에 임명되어 나태섭(羅 泰燮 )과 같이 섬서성( 陝西省 ) 서안 ( 西安)에 파견되었으며, 1939년 10월에는 다시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출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 편 동년 11월에는 화북( 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을 시작하였다. 1940년 9 월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사령부 부관장( 副官長)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10월에는 서안( 西安)에서 총사령대리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 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생계부장( 生計部長)에 임명되어 광 복 시까지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학수 가 6살 때 단양으로 내려와 거주했던 집터의 위치는 「몽호 황학수의 생애와 독립운동」 537쪽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집은 멸실되었고, 새롭게 민가가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