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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 이강년·이인영 의진이 죽령 일대를 중심으로 열흘 남짓 일본군과 교전한 곳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58-5, 292, 산20-1 일대 충청북도 단양군 남면 용부원리 죽령·매바위·태봉·장림 산야 변형 - 제천 싸리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강년 부대는 1907년 10월 24일에 다시 남쪽으로 행군하 여 사기막을 거쳐 단양 임현으로 이동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죽령 아래 쪽에서 일본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10월 31일에 장림역으로 이동하여 좌·우선봉으로 태봉(고속도로 옆, 용부원4리 산58번지) 동쪽 언덕에 매복하여 죽령 일대를 차단하였다. 이후 이인영 부대와 연 합하면서 죽령 일대(산19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일본수비대와 접전하 였 다. 먼저 죽령 아래 매바위(산48번지 일대 마을)쪽에 일본수비대 수십 명이 출몰하자, 좌·우 선 봉에게 아래 위 통로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의병들은 이틀 후인 11월 2일에 죽령을 넘는 수 비 대를 공격하여 6명을 사살하였다. 5일에는 수비대의 기습이 있었고, 6일에도 교전하여 8명 을 사살하였다. 7일에는 일본수비대가 매바위로 와서 민가에 불을 질렀다. 10일에도 고리평에 서 전투가 있었다. 11월 11일에는 적군이 남면과 장림으로 나누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강년 부대 는 풍기의 병참이 비었을 것으로 계산하고 모든 병력을 인솔하고 죽령을 올라 공격을 준비하는 데, 갑자기 일본군이 남북쪽에서 들이닥쳐 매바위의 좁은 목을 가로막고 사격을 가해 왔다. 의병 들 은 그들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여 소백산 정상 쪽으로 흩어졌다. 이강년이 남아서 병력을 호 령 하고, 좌우선봉의 견제 사격으로 일본군의 추적을 뿌리치고 산마루에 오를 수가 있었으나, 병 력 의 손실이 컸다. 별진에 속해 있던 청풍 선비 임석준(林 晳準)도 병으로 뒤쳐졌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죽령에서의 패전은 이강년 부대에게 매우 큰 타격이었다. 이강년 부대는 간신히 부대를 수습하여 소백산 등성을 넘어 영춘 쪽으로 갔다. 대강면 용부원리 의병전투지는 2008년 조사에서 단양군향토사연구원인 지성룡의 증언을 통 해 죽령, 태봉, 매바위의 위치를 비정하였다. 이강년 부대가 10월 31일 이동한 장림역은 대강면 대강면 용부원리 의병전투지 의병운동 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