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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을미의병 때 전군장으로 활약한 정운경의 생가 터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621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 동림 612 가옥 멸실 - 정운경( 鄭雲慶, 1861~1939)은 제천시 청풍면 동림리 출신으로 자는 화유(和有 ), 호는 송운 ( 松雲)이다. 1894년에는 영춘에 살면서 허준( 許駿), 권진(權璡 ) 등과 함께 동학농민군 지도부를 쳐부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여 1896년 1월 전군장 이 되어 청풍의 북창일대를 방어하였고, 후에는 원주의 신림 쪽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유인석 의 서행에 참여하였고, 원세개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심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영춘 산골에 은거하면서 농민의 입장에 서서 부당한 관권에 대항하였고 향약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무효를 부르짖으며 의병을 일으킨 원용 팔(元容八)이 9월에 체포되고, 박정수( 朴貞洙) 역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 식을 접하고, 단양( 丹陽 ) 일대에서 이규석(李 圭錫 )·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 )·지원영(池源 永 )·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의거의 깃발을 올리고 군사를 모으니 수일간에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군 일대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며 삼사백 명 의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원주 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 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그리고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의당 박정수( 義堂 朴貞 洙 )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황해도 철도( 鐵島 )에서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고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지조를 굽히 지 않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 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운경 생가는 「정운경 공적조서」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생가는 제천시 금성면 월림1구 에 위치하는데, 생가 터에는 새롭게 민가가 조성되었고,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집 앞에는 이곳 이 정운경 생가 터임을 알리는 안내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정운경 생가 터 의병운동 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