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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의병장 유인석이 장담에서 살던 곳.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468 충청북도 제천군 근좌면 공전리 가옥 복원 - 유인석( 柳麟錫 , 1842~1915)의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호는 의암( 毅菴), 자는 여성( 汝聖)이다. 14살 때 이항로( 李恒老, 1792~1868)에게 수학했으며, 그 뒤 김평묵( 金平默, 1819~1891), 유중 교(柳重敎, 1832~1893)에게 수학했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이 나왔는데, 최익 현·유중교·김평묵·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다. 1893년 성재가 장담에서 운명하자 자양서사에서 강학하던 유중교의 기반을 계승하기 위하 여, 1895년 6월 춘천 가정리를 떠나 장담으로 옮겨 후진을 양성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 발령이 발표되자 장담 선비들과 더불어 처신 방법을 두고 논의한 결과 의병을 일으키는 길, 망 명하여 도를 지키는 길, 자결하거나 은거하는 길 세 가지 노선을 정리하고, 자신은 망명하여 도 맥(道脈 )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안승우( 安承禹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 등 여러 문인 사우들이 봉기하자 이를 후원하였고, 후에는 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의진( 湖左義陣) 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영월에서 등단한 유인석은 곧장 제천을 장악하고, 개화 정부의 명을 받드는 지방관들을 처 단 하여 난신적자(亂臣賊子 )를 베는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이후 친일 정책의 지방 거점인 충주관찰부를 공략하고, 충청남도·영남 지방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친일 지방관을 처단 하였으며, 영남 일곱 고을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로써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를 자극하였고,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의병 부대들이 제천으로 달려와 대규모 연합 의진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좌의진은 이후 9개가 넘는 주변 고을을 장악하여 사 실상 군정을 시행하였다. 지방관을 몰아내거나 굴복시키고 각 고을에 지방관 대신 수성장( 守城 將)을 임명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의병 투쟁에 동원하는 한편, 가흥과 수안보에 자리 잡은 일 본군의 병참을 공격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결국 장기렴의 관군 군대에게 패하여 근거지인 제천을 내주었고,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서북 지방에서 재기하기 위하여 서행 ( 西 유인석 고택 의병운동 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