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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 8월 의병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 충청북도 제천시 천남동 240-4 일대 충청북도 제천군 근좌면 천남리 산야 변형 -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과 해산 군인들의 저항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연결되었다.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원주진위대 역시 일본군과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제천 지역에서 봉기 한 의병들에게 1907년 8월 15일 일본군이 원주 쪽에서 팔송( 八松 : 제천 봉양면 팔송리)을 거쳐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고, 청풍 쪽으로부터도 일본군이 들어온다는 정보가 전해왔다. 당시에 출동한 병력은 원주에서 출동하였던 시모바야시[ 下林] 소좌가 파견한 스에야시[ 末安] 중 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으로 원주 진위대의 행방을 쫒아온 것이었다. 당시 제천에 모여들었 던 이강년(李康秊 )·윤기영(尹基榮)·민긍호(閔肯鎬)·박여성(朴汝成)·오경묵(吳敬默)·정대무(丁大 武) 등 여러 의진은 정연한 지휘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일본군에 대항하여 최초의 연합작 전을 벌였다. 제천에서의 첫 전투는 천남에서 벌어졌다. 윤기영은 천남 뒷산에, 민긍호는 남쪽에 매복하였 다. 오경묵과 정대무의 부대는 서울고개(제천 동현동의 백배미 남쪽에 있는 고개) 좌우편에 매 복하였다. 이강년이 이끈 병력은 영월 쪽의 조을치( 助屹峙 : 제천의 두학동에서 영월의 남면 교 토리 쪽으로 넘어가는 조리재, 왕박산 줄기에 있음)까지 물러났다.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제천에 입성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매복하였던 의병부대와 청풍으로 가는 길쪽 마을에서 숙영 하던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강년이 인솔하던 병력이 아사봉 뒤로부터 역습하여 일본군의 뒤에서 공격하여 4시간이 넘는 접전이 벌어졌다. 동원된 의병 측의 병력도 민병까지 합치면 2천 명 이상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대패하여 충주 쪽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충주에는 니노미야[二宮] 소위의 1개 소대가 수비대로써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이날의 전투 결과에 대해 『창의사실기』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 입히는 전 과를 올렸다고 하였고, 이후 『운강선생창의일록』에는 이 전투에서 5백여 명의 적을 죽이고 13 명의 적을 부상시켰다고 기록하였다. 반면 일본측 기록에는 『한국주차군사령관보고』에 부상병 천남동 의병전투지 의병운동 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