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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896년 5월 23일 의병과 관군의 전투가 있었던 곳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 64-2 일대 충청북도 청풍군 북면 월굴리 산야 변형 - 1896년 2월 말에서 3월 초에 접어들면서 의병진 내에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대한 위기의식 이 점차 고조되었다. 제천의병은 적의 잦은 출몰에 맞서 싸웠다. 4월 20일(음 3.8)에 동창에 주 둔하던 이강년(李康秊 )의 부대가 제천으로 돌아왔다. 4월 25일(음 3·13)에는 참령 장기렴( 張基 濂)이 관군 400명을 거느리고 충주에 도착했다. 의병과 관군 사이에는 고종이 의병 해산을 요 구하는 칙유(勅諭 )에 대한 반박이 오갔다. 그러나 5월 23일(음 4.11)에 이르러 의병 해산문제를 둘러싸고 문서만이 오가던 소강상태가 깨졌다. 장기렴의 관군이 제천을 향하여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밤 어둠을 틈 타 장기렴의 관군이 대덕산을 타고 깊숙이 침투하여 북창에 주둔 중인 의병부대를 내려다보면 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북창의 의병들은 대적하지 못하고 높은다리(高橋)까지 물러서서 적을 막았다. 결국 관군은 북창, 교동, 죽문 밖의 높은 다리 일대를 장악하고 무력시위를 하였다. 한편 남산전투에서 좌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유인석은 후군장 신지수( 申芝秀)에게 강녕에서 돌아오는 적을 봉쇄하도록 하고 총력을 제천방어와 청풍 쪽의 전선에 집중시켰다. 총독 조달승 ( 曺達乘), 별모장군 이원하(李元廈 )에게 높은다리를 지키게 하고 전군, 참군은 여러 성을 나누 어 교대로 숙직하면서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단양의 장림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부대에게는 관 군의 배후를 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신속히 진격하여 높은다리 방어선을 우회하여 산길을 타고 5월 25일(음 4.13) 제천을 향해 깊숙이 고장숲까지 들어왔다. 이러한 내용은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높은 다리는 수몰되었고, 현재는 그 위에 같은 이름의 다리가 1983~1985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일 제강점기 지형도에서 보면 ‘고교(高橋)’라는 명칭이 보이며, 지금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주변은 청풍호 조성 과정에서 상당부분 수몰되었다. 2008년 조사내용에 따르면 수위가 낮아지면 의병전투 당시의 높은 다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금성면 의병전투지 의병운동 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