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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57 는 사실상 연구의 공백 상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를 복원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는 우선 신문의 보도내용과 조선총독부 등 일제 측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 다. 1910년대 일제의 침략상과 민족운동사를 밝혀야만 전후 독립운동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 을 것이다. 예컨대 광복회 충청도 지부에 충북에서는 유독 괴산 출신의 인사(康昌淳 · 申陽春 · 申 玉鉉 ·李喜求 · 鄭雲洪 )만이 참여하였던 사실이 학통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1910년대 충북의 민족운동을 알려줄 수 있는 주제의 하나로 사료된다. ⑤ 3·1운동의 지역사적 특징이 규명되어야 한다.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거국적·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특징적 양상 도 보이며, 충북의 경우도 봉화만세시위가 특징으로 파악되는 등 일부 규명된 바 있다. 그러나 아 직 3·1운동 발발에 대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타도와의 비교사적 연구는 미약한 실정이다. 특 히 충북 출신 민족대표에 대한 논의, 손병희가 지역 만세운동에 끼친 영향, 주동세력에 대한 분 석 등은 더욱 천착하여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⑥ 3·1운동 이후 다양한 민족운동의 양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이념과 방법론상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충북 지 역의 경우, 1920·30년대의 노동·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 다만, 일부 지 역의 신간회 지회와 청년운동이 검토된 바 있고, 나머지 분야는 자료정리 조차 이루어지지 못 한 실정이다. 이 또한 당시의 신문기사와 조선총독부의 자료 등을 통해 규명되어야할 것이다 . ⑦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물 평전을 만들어야 한다.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훈포장을 받은 인물은 총 521명(2020년 8월 현재)에 이른다. 이 가운데 류인석·이강년·한봉수·이상설·손병희·신규식·신채호·신팔균·홍진·황학수 및 권동진 ·권 병덕·신석구·신홍식·정춘수 등의 이른바 민족대표와 같이 독립운동사의 각 분야를 주도한 인 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들에 대하여는 일부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 우 는 중앙사 차원의 연구이며, 지역사 차원의 연구는 많지 않다. 이들에 대한 개인, 또는 종합 평 전을 계획하여 추진하여야 한다. 다만, 특정 문중의 과열된 숭조사업이나 현창사업 차원의 접 근은 배제되어야 하며 실사구시적 평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⑧ 민족통일에 대비한 지역사의 연구가 요구된다.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이 한 때 급류를 타는듯하더니 다시 긴장상태가 조 성 되어 안타까운 심경이다. 분단 상태의 장기화와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민족사의 이질화 현상 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아직 미흡하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념에 따 른 인물 평가의 극단화이다. 이는 남북한 간 인식의 괴리가 큼은 물론 지역 내에서조차 평가를 둘 러싸고 갈등이 잔존해 있는 실정이다. 홍명희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생가에 세운 문 학 비가 보훈단체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고 새로운 비문이 만들어졌다. 이는 역사의 이념화가 파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