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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 활동을 한 백남규 의병장이 태어난 곳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산95-1 충청북도 충주군 금가면 월상리 가옥 멸실 - 백남규( 白南奎, 1884.8.22~1970.2.19)의 호는 운암( 雲庵)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진위대 부위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경 상북도 순흥(順興 )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여 명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그때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李 康秊 ) 부대가 강원도 횡성( 橫城)의 봉복사(鳳腹寺 )에 있다는 소식을 듣 고 찾아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장( 右先鋒將)으로 임명되었다. 9월 16일 제천 추치( 楸峙 )에 매복 하였다가 적 200여 명을 사로잡았다. 10월 거석리( 巨石里)로 들어가 험준한 요새지를 찾아 유 진하고 있는데,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 였다. 그의 임무는 허섭( 許燮)에게 맡겨졌는데 나중에 허섭이 적에게 패하고 항복하자 할 수 없 이 백남규가 돌아와 우선봉의 임을 맡게 되어 다시 의진의 진용을 수습한 것이다. 재정비한 진 용은 의병장 이강년, 도전장 윤용구( 尹容九), 우선봉 백남규, 우군장 변학기, 우익장 정연철이다. 이때 인근의 관동의진이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을 청해 왔을 정도로 의진의 형세가 자못 장엄하였다. 1908년 6월 의병장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된 뒤에는 김상태(金 尙台 )가 의진의 지휘권을 행사 하였고, 백남규는 그 한 부대를 지휘하여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성과를 거 두었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간 복역하다 일제의 대사령으로 출감하였다. 1918년에는 상하이[ 上海]로 망명을 기도하다 가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백남규 생가 터는 공적조서를 통해 본적이 중원군 가금면 월상리임을 확인할 수 있고, 2008 년 조사에서 후손 백준규(충주 거주)의 증언으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형 도에서 보면 당시에는 달천 동쪽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백남규 생가 터 의병운동 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