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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896년 2월에 유인석의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점령한 후 충주성을 탈환하려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232-2 일대 충청북도 충주군 건물 멸실 현충시설(제천의병전투지-충주성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충격으로 전국에서는 항일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1896년 초 강원도 영월에서는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 포군이 주축이 되어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호 좌의진(湖左義陳)이 조직되었다. 호좌의진은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베는 것으로 시작하여, 2월 16일에는 제천에서 출발하여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는 당시 관찰부가 있어 호서지방의 요지이므로 이곳을 점거하면 호 서 일대를 장악하는 발판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이조승(李肇承 )의 『서행일기(西行日記)』 당시 충주성은 경병 400명, 왜병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 명의 군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2월 16일 유인석은 군사 4,000명을 거느리고 제천을 출발했다. 행동에 앞서 지방대 두령들 의 내응을 확보하는 준비를 거쳤으며, 2월 17일 이들의 협조로 성문이 열려진 충주성의 남문과 북문을 통해 무혈 입성했다. 유인석은 입성 후 의병 토벌죄 및 단발 강요죄 등을 내세워 관찰사 김규식(金奎軾 )을 처형하였다. 2월 17일 당시 충주 근처에는 수안보와 가흥에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 중이었다. 따라서 충주 성이 의병의 수중에 들어간 다음날부터 의병은 충주성, 가흥, 수안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 를 벌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 중군장 이춘영(李春永 )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으로 진군하여 좌우에서 병참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하였다. 이때 일본군 7명이 병참 밖으로 나와 응사하였다. 1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이춘영은 일본군이 발사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2월 23일 에는 충 주성을 넘어 의진에서 기습공격을 가하는 일군 60여 명을 격퇴시켰다. 2월 24일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충주 향교에 불을 질러 모 든 위패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29일 일본군은 단월 방면에서 2일 동안 다시 충주 충주성터 의병전투지 의병운동 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