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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1919년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한 연병호가 1894년에 태어난 곳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 석곡동 가옥 복원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 현충시설(애국지사 연병호선생 생가) 연병호( 延秉昊 , 1894-1963)의 호는 도명( 圖明)이며 증평에서 출생하였다. 연병환, 연병주, 연 병오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안 중명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베이징[ 北京 ]대학을 졸 업하였다. 그는 1919년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였다. 청년 외교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지원하는 청년들의 단체였다. 그리고 청년들을 주체로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이 세대로 이어가며 발전해 간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체였다. 국내에서 청년외교단의 조직이 정 비되자 연병호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주로 향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 주 독립군을 연계하는 일이었다.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합에 힘을 기울여 나갔다. 연병호는 1919년 말 북간도 안도현에 근거지를 둔 대한정 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이후 1920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 른 뒤, 베이징[ 北京 ]에서 독립군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의 정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8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임시정부 한국 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괴산군에서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0년에도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연병호 판결문에는 본적을 괴산군 도안면 석곡동으로 적고 있다. 지금의 연병호 생가는 복원 된 것인데, 당초에는 연병호의 부친인 연채우가 살던 초가 2칸 규모였으나, 선생이 손수 뒷산 에서 재목을 잘라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 조하였다가 1986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사업 결과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 연병호 생가 임시정부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