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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47 시 압수당한 붉은 잉크로 쓴 격문의 내용과 피체된 청년들의 사상적 기저가 사회주의와의 관 련 성이 있을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또한 2월 7일 오후 3시 반경에는 충주군 이류면 大召公普 학생 30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깃 발을 휘두르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급보를 받고 충주경찰서에서 출동한 서장 이하 수명의 일경 이 10명의 학생을 체포하여 취조하고 4명을 구류처분 하였다. 160) 일경은 이 지역 청년 5명도 체 포하여 취조하고 구류처분을 하였다. 161) 이로써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런데 1931년 6월 14일 청주군 북 일 면 內秀公普 교정의 나무에 ‘독립만세’라고 쓴 격문이 부착된 일이 발단이 되어 내수공보 학생 들이 맹휴투쟁에 나서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162) 일제는 이 사건을 고의적으로 확대시켜 교 사와 학생을 탄압하여 급기야 교사 洪鳳熹 가 사직하였고, 괴산청년동맹원의 집을 가택 수색하 는 등 탄압하였다. 163) 한편 1931년 9월 4일에는 청주농업학교에서 격문 살포와 만세시위가 있었고, 이로 인해 청주 일원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었다. 이 사건은 농업학교 3학년생이 주도하 고 2학년생이 가담한 것인데, 백여 명의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갔다. 일경은 즉시 趙重晩 등 농업학교 학생 7명과 시민 45명을 체포하였다. 164) 청주경찰서는 도 경찰부와 합력하 여 철야로 대대적인 가택수색과 관련자의 체포에 나섰다. 시민으로서 피체된 사람들은 학생·교 원·신문기자·운전수·시계상·잡화상·양복상·일반 청년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165) 1930년대의 학생운동은 학내문제보다 사상투쟁과 반파쇼투쟁, 조선일보 주최의 문자보급 운 동과 동아일보 주최의 브나로드운동 등을 통한 문화계몽운동, 비밀결사투쟁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166) 바로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격문 살포와 만세운동에서 등장한 붉은 기와 무산자 혁명의 구호는 1930년대 학생운동에서 나타난 사상투쟁의 특징적 현상이 충북지역에서도 나 타나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30년대의 학생운동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수업료 인하와 철폐운동이었다. 이는 1929년 경제공황의 여파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식민지 교육 반 대투쟁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167) 충북에서 수업료 면제 투쟁이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은 槐山 이었다. 즉, 수업료 문제가 전국으로 확산될 무렵 靑川公普後援會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총회에 160 《東亞日報》, 1930년 2월 12일, 2월 13일자. 161 《東亞日報》, 1930년 2월 14일, 3월 6일자. 일경에 피체된 청년과 구류처분 내용은 柳信德·朴義陽·林龍根 각 29일, 李 相烈 25일, 韓宣坤 20일이었다. 162 《朝鮮日報》, 1931년 6월 22일자. 163 《朝鮮日報》, 1931년 6월 28일자. 164 《東亞日報》, 1931년 9월 5일자. 일경에 피체된 농업학교 학생은 趙重晩·宋在燐·柳壯烈·李喆淳·金榮基·李壽永·南廷鎭 등이 었다. 165 《東亞日報》, 1931년 9월 7일자. 166 韓貞一, 1981, 『日帝下 光州學生民族運動史』, 전예원, 201~205쪽. 167 金鎬逸, 1991, 『일제하 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