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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44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는데, 이 가운데에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 1,642명의 희 생 이 발생하였다. 142) 3·1운동 때에 참여한 학생이 12,996명이란 통계와 비교해 보면 가히 그 규모 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여파는 청주에도 파급되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1930년 1월 20일 경 淸州高普 학생들 사이에 운동의 움직임이 있었고, 일경은 ‘특히 엄밀한 사찰’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3) 그러나 1930년 1월 21일 오전 9시 반경, 4학년과 5학년 학생을 제외한 전교생이 일 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277명의 청주고보 학생들 은 교사와 경찰의 제지를 뚫고 청주농업학교 방면으로 뛰쳐나갔다. 이 때 사전 연락에 의해 청 주농업학교에서도 5학년생을 제외한 231명의 학생이 조회를 마치자마자 교문 밖으로 행진하여 청주고보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제지로 인해 진로가 막힌 500여명의 학생 시위대는 무심천 일대에서 일경과 대치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수천여 매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격문의 내용은 ‘ 白衣魂 싸고도는 黑雲 을 격파하고 광명한 자유로운 길을 밟자’, ‘굳세게 싸워라. 용감히 저항하 자’, ‘조선 민족은 자각하여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유를 찾자. 만세 만세’ 등이었다. 이날 일본인 학교인 청주고녀에 다니던 조선인 여학생 30여명도 동맹휴학으로 학생시위에 동참하였고, 상인 들은 철시를 단행하여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하였다. 144) 청주고보·청주농업학교·청주고녀 등 청주 시내 세 개 학교 연합 시위의 주도자의 한사람은 李 仁粲이었다. 그는 朴遇陽 · 具然幸 ·李範繩 등 같은 학교의 학생 및 청주농업학교 학생 朴 魯 燮 · 全 忠植 등과 만나 兩 校 가 연합하여 아침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이 들은 거사 전날 밤, 학교 등사판을 몰래 가지고 나와 박우양의 하숙방에서 이인찬, 이범승 등이 방문을 이불로 가리고 밤을 새워 여러 종류의 전단을 등사하였다. 이 전단은 시위 현장은 물론, 학생들이 일경에 피체되어 압송되는 도중 차창 밖으로 살포되기도 하였다. 145) 이날의 학생시위로 洪性一 · 咸貴奉 ·李仁粲 등 청주고보 학생과 全忠植 · 朴 魯 燮 등 청주농업학 교 학생 등 수십 명이 일제에 검거 당하였다. 일경은 학생들의 집에 전단이 숨겨져 있다는 제보 를 받고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의 집을 가택 수색하는 한편 나머지 주도 학생과 사회단체 인사 들을 검거하였다. 146) 또한 청주고녀 학생 金鳳任 등 10명의 학생들도 1월 24일 일경에 피체되어 장시간 취조를 당하였다. 147)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청주경찰서와 각지에서 응원 온 수백 명의 경관으로 하여 금 142 국사편찬위원회, 1976, 『韓國獨立運動史』 資料5, 261쪽. 143 조선총독부 경무국, 1979, 『朝鮮總督府警務局極秘文書 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 風媒社, 177쪽. 144 《東亞日報》, 1930년 1월 22일, 1월 25일, 1월 26일, 1월 29일, 1월 30일자 및 《朝鮮日報》, 동일 자. 145 『雲耕李仁粲一生記』, 5~9쪽. 이는 청주학생운동 주도자의 한사람인 이인찬이 自述한 회고록 성격의 자료로서 그가 출 생한 1909년부터 1991년까지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일부 오류도 있으나, 청주 학생운동의 계획과 진행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 움이 된다. 146 《朝鮮日報》, 1930년 1월 24일자. 147 《東亞日報》, 1930년 1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