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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41 ‘師而網其徒’, ‘訓導의 警吏眼 ’ , ‘一個 低能兒의 妄動 ’이라고 공박하였다. 128) 또한 ‘ 沒常識한 公 普 校長 - 淸州 米院公普 의 怪常事-’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다시 미원공보 교장을 비판하며, 이 는 단지 미원공보 교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일본인 교장의 문제라고 우려하였다. 129) 1927년 당시 전국 보통학교 1,187개교 가운데에 한국인이 교장으로 재직한 곳은 37개교 로 3.1%에 불과하였다. 이에 《중외일보》는 보통학교 교원 전부를 한국인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 하 기도 하였다. 130) 이 같은 미원공보 학생의 시험 답안 사건이 구체적으로 학생운동으로 연계되었 는지 여부는 자료의 결핍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公普 의 식민지 교육 현실 을 여실히 알려주며, 이 시기 학생운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926년 5월과 6월에는 堤川公普 학생들이 2차에 걸친 맹휴투쟁을 벌였다. 당시 언론은 연 일 이 사실을 보도하며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제천 공보 학생 4·5·6학년생 전원은 1926년 5월 14일을 기하여 전교생의 맹휴투쟁을 결의하였다. 거사 전날인 5월 13일 오후 3시경, 학생 대표 30여명은 邑部里 金 演三의 집에 모여서 「 同盟休學 理 由書 」를 등사하였다. 그러나 경찰에 발각 되어 서장과 형사가 현장으로 달려와 대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을 취조하다가, 이들 중 3명을 경찰서까지 끌고 가서 취조하였다. 일경은 학생들이 등사한 인쇄물을 모두 압수하여 소각해 버 렸다. 이로써 보면 堤川公普 학생 1차 맹휴의 원인은 교원으로서 모범되지 못하거나 불미스러운 행 동을 한 자를 배척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경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맹휴는 계획 대로 결행되지는 못하였다. 맹휴 예정일이었던 5월 14일, 일부 결석자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 생들은 등교하였다. 그러나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131) 제천공보 학생들의 1차 맹휴 계획이 있은 지 1달만인 6월 14일, 제2차 맹휴가 단행되었다 . 6 월 14일에는 5, 6학년 학생 120명이 맹휴투쟁에 참여하였고, 이튿날인 6월 15일에는 전 학 년 이 참여하였다. 2차 맹휴는 1차 때와는 성격이 다르다. 2차 맹휴투쟁은 융희황제의 승하에 대 한 일본인 교장의 불경한 언동과, 제반 학사에 대한 교장의 불합리하고 고압적인 처사, 학내 문 제를 경찰에 의뢰한 무책임한 처사 등에 대한 불만이 복합되어 비롯되었다. 요컨대 제천공보 생 의 제2차 맹휴는 6·10만세운동 이후의 맹휴투쟁이 민족적 성격을 띠며 일제에 대항하려 했 던 전국적 추세와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7년에는 청주 농업학교 와 청주고 보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에 반발 하며 맹휴 투 쟁에 돌 입 하였다. 公普 에 이어 중등학교 학생들의 맹휴투쟁에 나선 것이다. 1927년 9월 22일부터 청주 농업학교 4학년생 35명이 일본인 교장 高山의 무성의한 교육태도를 배척하기 위해 맹휴에 돌 입하였다. 132) 당황한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고 다방면으로 학생들을 찾아 나섰으나 128 《朝鮮日報》, 1926년 3월 21일자(朝刊). 129 《朝鮮日報》, 1926년 3월 27일자(夕刊). 130 朝鮮總督府警務局, 1929, 『朝鮮に於ける同盟休校の考察』, 96~99쪽. 131 《東亞日報》, 1926년 5월 18일자. 132 《東亞日報》, 1927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