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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40 1920년대 충 북지역의 학생운 동 은 1925년 5월 6일 괴산 淸安公普 학생들의 교원배척운동 으로부터 본격화하였다. 즉, 청안공보 6년생 24명은 평소 불성실한 교사 金 昌淳을 배척하기 위 해 일본인 교장 大崎 에게 4개항의 진정서를 제출하고 만일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전원이 맹 휴에 돌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당황한 학교 당국은 주도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여 무마하고 자 하였다. 123) 또한 학교 평의원회에서도 鄭鉉浩 , 吳德遠 등이 나서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金 昌 淳 이 사과를 하고, 교장도 김창순을 금번 학기까지 수업을 시켜보고 불만스런 사항이 계속되면 상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함으로서 해결되었다. 124) 또한 이해 10월에는 槐山公普 전교생이 한민족을 모욕하는 폭언을 내뱉는 일본인 교장 兒島 를 배척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兒島는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말끝마다 “조선인은 식충 이다”, “조선은 약하다. 일본은 강하다”라는 등의 민족 멸시적인 폭언을 상습적으로 하였다. 이 에 분개한 학생들이 교장 배척운동을 계획하자 학부모들도 동조하였다. 학부모들은 제3회 정기 총회를 열어 교장을 각성시키자고 논의하였으며, 이 같은 교장에게 자제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 다며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25) 이해 11월 18일에는 道安公普 2,3학년생들이 교장 배척을 외치며 맹휴투쟁에 나섰다. 학생들 은 교장이자 2,3학년 담임을 겸하고 있는 岡村國堂 이 한 달에 몇 번씩 사적인 일로 결근을 하 고, 또한 운동회 준비를 핑계로 청주에 나가 2일간이나 결근하자, 이같이 불성실한 교장에게서 배울 수 없다며 맹휴를 단행한 것이었다. 도안공보생의 맹휴 때에도 학부형들이 동조하였다. 126) 이로써 보면 1920년대 충북지역의 학생운동은 淸安公普 , 槐山公普 , 道安公普 등 괴산 내의 公普 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6년의 경우, 米院公普 의 시험 답안이 커다란 사회문 제가 되었고, 堤川公普 학생들의 2차에 걸친 맹휴투쟁이 있었다. 米院公普 시험 답안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1926년 3월 1일 미원공보의 교장인 二羽芳夫는 修身 과목의 시험문제를 내며 “지금 조선이 이와 같은 경우에 있은 즉 장래에 어찌하면 잘될 것 인가를 각각 말하라”고 하며 ‘ 朝鮮 현상에 鑑 하여 각자 결심을 말하라’는 문제를 출제하였다. 이에 대하여 5년생인 申亨植 이 독립사상에 대하여 서술한 답안을 제출하자, 당황한 교장은 이 시험 답안을 가지고 도청과 경찰관 주재소를 출입하며 대책을 협의한 끝에 신형식을 무기정학 에 처했던 것이다. 127)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일보》는 기사와 「 時評 」, 「 社說 」, 「휘파람」란 등을 통해 연일 일본인 교장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조선일보》는 ‘무기정학’이라는 제하의 「시평」에서 이 시험 문제는 公普 학생들 에게는 적당 치 않은 시사와 정치사상 에 관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 교장의 행위를 123 《朝鮮日報》, 1925년 5월 8일자. 124 《朝鮮日報》, 1925년 5월 9일자. 125 朴杰淳, 1996, 『槐山地方 抗日獨立運動史』, 괴산문화원, 197~198쪽 및 《東亞日報》, 1925년 10월 26일자. 126 《朝鮮日報》, 1925년 11월 30일자. 127 《朝鮮日報》, 1926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