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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박세화가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단식 23일 만에 순국한 곳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383-9 일대 충청북도 음성군 근서면 동음 가옥 멸실 - 박세화( 朴世和, 1834~1910)는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도사 ( 都事 ) 윤응선과 함께 문경에서 창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8년 음성 만생산 창동 일대로 호적을 옮겼다. 1910년(순종 4) 7월 한일합방이 되자, ‘예의조선’이라는 4 자와 절명시 두 수를 남기고 단식 23일 만에 순절하였다. 1962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당 박세화와 관련하여 제천시 금성면 사곡리에는 그를 배향한 병산영당이 위치한다. 이 영 당은 본래 1907년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에 용하영당을 창건하여 회암( 晦庵) 주자(朱子 )와 우 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두 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후에 의당 박세화 선생과 그의 제자 회 당( 晦堂) 윤응선(尹應善 )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한편 6.25전쟁 중에 용하영당이 소실되자 문인 들이 청풍면 장선리 병산곡에 병산영당을 신축하였다가, 건물이 퇴락하여 1994년 제천시 금성 면 사곡리로 영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는 1964년 의당 박세화를 비롯 하여 회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명와 정규해 등을 배향한 충용사가 건립되었다. 박세화 집에 대해서는 『의당집·부록』권9, 「행장」에 “천하를 돌아보아도 한 조각의 정토( 淨土) 도 없었다. 이에 문인들이 서로 더불어 모의한 끝에, 설성 창동의 만생산 산중으로 옮기게 되 었 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의당집·부록』 권9, 「연보」 ‘천적우설성만생산창동( 遷籍于雪城萬生 山昌洞)’이라고 하였고, 같은 책 「창동일기」 ‘선생자정우설성지창동정사(先生自靖于雪城之昌洞 精舍 )’라고 하여 호적을 옮긴 사실을 알 수 있다. 창동 고택지의 위치는 정경훈의 연구에서 당시 90세 김양섭옹과 82세 김정석옹의 전언에 근거하여 추정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박세화 사후 오랫동안 동음리 창동 주민들을 비롯한 일대 유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박세화 집 의병운동 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