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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36 대표를 자처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도 서산 시위의 원인을 당국이 식림을 강요하여 토 지 가 없는 주민들에게까지 묘목을 강매하고 대금을 징수한 때문이라고 인정하였다. 95) 또한 충북 지역민은 식민지 교육에 대해서도 불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괴산·충주·진천·제천·내수 등지에서 는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하거나 동참한 바 있다. 96) 3·1운동의 여파는 일제 식민지 교육 거부로 연계되어 학교의 신입생 모집이 1/3밖에 되지 않거나 일제의 교육기관을 피해 서당에 들어가 는 생도가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97) 한편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일본인이 경 영하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도 벌어져 일본인 상점의 수입이 1/3로 감소하기도 하였다. 98) 이 에 일제는 친일 관료와 부호 및 일본인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自制會 · 自制團 등의 어용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향촌질서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는 국지적으로 민족의 내 부 붕괴를 기도한 것이었다. 일제가 어용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한 것은 이미 의병전 쟁 때 의병과 민중간의 유대를 끊기 위해 획책한 바 있다. 99) 그런데 이러한 친일 어용조직이 독 립운동의 탄압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친 것은 3·1운동 때였다. 이러한 어용조직은 지주 중심의 친일기구로써 주로 일부 남부지역에서 조직되었으나, 조직 과정에서 민중의 저항을 받기 도 하였다. 100) 충북에서는 4월 중순에 淸州自制會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조선인 부호와 유력한 일본인 거류민의 연합조직으로써 독립운동을 억제하고 향촌 질서를 파괴함은 물론, 양국민의 상호 융화를 표방하여 결국 한민족말살과 ‘내선일체’에 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 101) 여덟째, 충북지역의 3·1운동은 20~30대의 젊은 농민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충북 의 각 군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피체된 자로 연령이나 직업의 확인이 가능한 인원은 139명인 데, 이들은 20대가 61명(44%), 30대가 41명(29.5%)으로 전체의 3/4에 달한다. 또한 이들 중 다 수 인 103명(74%)의 직업이 농업이었다. 102) 마지막으로 3·1운동은 이후 충북지역 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3·1운동의 경 험을 토대로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전위로 성장하며 1920, 30년대 동맹휴학 등을 통해 충북 지 역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103) 류자명처럼 3·1운동의 참가를 계기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성 장하여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주도하거나, 홍명희처럼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한 경우도 9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535쪽 및 815~816쪽. 96 『朝鮮騷擾事件狀況』에는 류자명이 교원으로서 학생들을 선동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도망하여 免官되었다고 특기 하였 다(『독립운동사자료집』제6권, 815쪽). 9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815쪽. 9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796쪽. 99 國史編纂委員會, 1966, 『韓國獨立運動史』 二, 300~301쪽. 100 충북에서도 일부 친일파가 주도한 自衛團 가입을 거부한 인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제가 자제회나 자위단 등 친일 조직 을 강화회의에서 한국인이 병합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는 선전 자료로 악용하는 것을 우려하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권, 675쪽). 101 《每日申報》, 1919년 4월 15일자. 淸州自制會의 發起人은 閔泳殷·安東正·元光漢·韓性敎·廉宣赫·吉原治三郞·松本杉·齋藤 金藏 등이었다. 102 黃富淵, 1987, 「忠北地方의 三·一運動」, 『忠北史學』제1집, 18~19쪽. 103 박걸순, 2001, 「日帝下 忠北地方의 學生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17집, 355~3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