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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33 ㉦ 충주군 3월 15일 충주 장날을 이용한 간이농업학교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계획은 일경 에 탐지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75) 그러나 4월 1일 신니면 신청리 용원 장날, 5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76) ㉧ 보은군 『 韓日關係史料集』과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 우리 측 자료에는 보은의 만세시위가 누락되 어 있으나, 일제측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다. 4월 초에 들며 인근의 옥천과 영동에서 격렬한 시위 가 전개되자 보은에서도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대전으로 부터 장교 이하 16명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하였다. 77) 그러나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4 월 8일 보은 소재지에서 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산외면 구티리에서 100여 명이 종을 울리며 만세운동을 시작하다가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해 해산 당하였다. 78) 4월 12일 밤에는 수한면 무서리에서 주민 100여명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만세운 동 을 벌였고, 13일 밤 11시에는 삼승면 선곡리 주민 30여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79) ㉨ 단양군 3월 4일부터 3일 동안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회고담이 있으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80) 또한 3월 20일 오후 8시경 군내 각 처에서 봉화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였으며, 4월 6일 단양 에 서 시위가 있었다고 하나, 이 또한 일제측 자료 등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81) ㉩ 제천군 4월 17일의 제천 장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장터에서 미리 제작 배포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82) 4월 18일에는 송학면 면사무소 앞뜰에 70여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만세 를 외쳤는데, 83) 이들은 이튿날 오전 1시경 면장 사택으로 몰려가 면장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외 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였다. 84) 75 류자명, 1999, 『한 혁명자의 회억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0~32쪽. 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091~1094쪽의 「殷慶玉 등 判決文」. 77 朝特報十號, 1919. 4. 16, 「騷擾事件に關する狀況」(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621쪽). 78 騷密第四三號, 1919. 4. 15,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四十八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603쪽). 79 騷密第三四三號, 1919. 4. 17,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五十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627쪽). 8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제3권, 77~78쪽. 81 李炳憲, 1959, 『三 · 一運動秘史』, 시사시보사, 889쪽. 8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090~1091쪽의 「李範雨 등 判決文」과 「張用根 등 判決文」. 8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권, 1089쪽의 「崔鍾律 判決文」. 84 騷密第六一五號, 1919. 4. 21,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五十四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6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