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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신팔균이 1907년 낙향하여 만주 망명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 신헌 고택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논실마을 가옥 원형보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1호 신팔 균( 申八均, 1882.5.19~1924.7.2)은 신헌(申 櫶)의 손자이며, 신석희( 申奭熙)의 아들로서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 正尉 )로 강계진위대 ( 江界鎭衛隊)에서 활약하다가 1907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였다. 그리고 이월면 노원리 강당고개에 보명학교( 普明學敎)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만주의 지도자로서 동지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19년에 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 울였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그 사령 관에 취임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 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 旺淸門二道溝)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 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신팔균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임수명( 任壽命 )은 갓 난 딸과 함께 자진하였다. 정부에서 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팔균 은 고향 에서 보명학교를 운영하였는데 당시 이곳 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2008년 조사에서 문중 후손 신응현(이월면 노원리, 당시 78세)의 증언으로 확인하였다. 신팔균 집 해외독립운동(만주방면)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