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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서전서숙을 건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서고, 1907년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어 해외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상설이 태어난 곳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충청북도 진천군 덕문면 산척리 가옥 복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 현충시설(숭렬사;이상설기념관) 이상설(李 相 卨 , 1870~1917)은 1870년에 이행우(李 行雨)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7세에 동부승지 이용우(李龍 雨)의 양 아 들 이 되어 한성부 남부 장동 장박 골로 갔 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이 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하여 외국어와 산술에 능통하였다. 19 0 4년에는 대한협동회를 조직하 여 민족 운 동 을 하였으며, 다 음해 탁지부 재무 관 법부현판 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1095년 11월 을사늑약의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해 12월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906년 4월 이동녕·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 上海]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 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항일 민족교육을 하였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 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鐘)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하였으며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이후 이 상설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교포들을 규합하여 성명회( 聲明會 )를 조직하여 일제의 병탄에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러시아·중국 등 열강에게 일제의 침략 을 규탄하고 한국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하지만 일제가 러시아당국과 교섭 을 벌여 이상설은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 석방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12월 김학만·이종호(李 種浩 )·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 勸業會 )를 조직하여 『권업 신문(勸業新聞 )』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 독립 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1913년 12월,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을 매장 이상설 생가 계몽운동 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