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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독립운동사개관 29 송태현 등이 청원군 우산리에서 주도한 만세시위, 43) 동일 괴산 소수에서 유해륜 등이 주도한 만 세시위 44) 등은 판결문까지 있으나 통계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또한 4월 2일에는 괴산 장연면 오 가리와 대성리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오가리 시위만 보고하고 대성리 시위는 판결문 이 있음에도 누락되어 있다. 45) 한편 일제는 각지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는 문건에서는 보고 하였으나, 통계표에서는 누락시킨 경우가 있는데, 4월 2일 청산 시위가 누락된 것이 그 사례이 다. 따라서 3·1운동 관련 통계는 우리 측이나 일제 측 모두 불완전한 것이데, 도내 각 군에서 최 소한 50회 이상의 시위가 발생하였음이 확실하다. ② 지역별 만세운동의 양상 46) ㉠ 괴산군 3월 19일, 충북 최초의 만세함성이 괴산 장터에서 울려 퍼졌다. 이날 만세시위 주도자는 洪命 憙 였는데, 그는 이날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선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손병희를 만나고 귀향한 뒤 숙부인 홍용식, 이재성 등과 협의하여 만세시위를 추진한 것이었다. 47) 이날 수많은 시위대는 경찰서로 몰려가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여 경찰서를 파 괴 하는 등 이튿날 새벽까지 격렬히 투쟁하였다. 이 때 괴산공보 학생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다 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 洪性憙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29일의 장날에 도 다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48) 청안은 縣 치소가 있던 옛 고을로서, 3월 30일의 청안 장날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3차 에 걸쳐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때 군중들은 경찰관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며 격렬히 항쟁 하였는데, 일제의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49) 장연면에서는 4월 1일과 2일에 걸쳐 2백여 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 세시위가 있었고, 인근의 대성리 뒷산에서 30여명의 동리사람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한 편 4월 1일에는 청천면에서 청천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이던 중 헌병주재소를 습격 하 였고, 2일에는 소수면에서는 주민들이 면장 집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칠성면에서 는 4월 3일 쌍곡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도안면에서는 4월 10일 광덕리에서 만세 시 43 국가보훈처, 2006, 『獨立有功者功勳錄』 제16권, 322~323쪽. 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독립운동사자료집』제5권, 1078~1079쪽의 「柳海崙 등 判決文」. 4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독립운동사자료집』제5권, 1080~1083쪽의 「曹圭鶴 등 判決文」과 「金義大 등 判決文」. 46 당시의 행정구역에 의거하여 서술한다. 4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독립운동사자료집』제5권, 1079~1080쪽의 「洪命憙 등 判決文」. 48 朴杰淳, 1996,『槐山地方 抗日獨立運動史』, 괴산문화원, 109~111쪽. 4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독립운동사자료집』제5권, 1084~1085쪽의 「金明鎭 등 判決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