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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26 이 통계는 임시정부나 우리 측 통계와 대비해 볼 때 참가인원이 축소되었음은 물론 특히 사 상 자수가 크게 축소되어 있어 일제측 의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31) 또한 군대의 출동과 발포 관련 통계 및 자신들의 피해 상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이듬해 1월 일제는 3·1운동 관련 통계를 수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북지역3·1운동통계표(Ⅳ)> 32) 道 名 箇所 回數 官憲側 普通民 示威群衆 官公署, 기타 피해 死 傷 死 傷 死 傷 忠淸北道 31 37 - 20 - - 28 50 18 이 통계 또한 우리 측의 자료와 격차를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제는 이 통계의 ‘비고’를 통 해 소수 인원이 단순히 만세를 외치거나 헌병 경찰관 소재지 외에서 시위가 일어나 후에 발견 된 것은 집계하지 않았으며, 동일 장소에서 2회 이상 시위가 일어난 것은 1회로 계상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한일관계사료집』이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이 같은 기준에서 정리된 것이기 때문에 축소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충북지역의 3·1운동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해서 언제 어디 곳의 시위를 끝으로 종료 된 것인가? 어떤 자료에는 3월 1일 청주, 33) 또는 3월 7일 청주에서 개시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34) 모두 사실과 다르다. 3·1운동 관련 자료 중 가장 신속히 보고한 것은 일제측 자료였다. 물론 일 제는 탄압의 주체였기 때문에 상황과 명분에 따라 보고 내용에 축소 또는 과장이 있을 수 있 어 주의를 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日次 또는 정기 보고가 계속되었고 현장성을 지니고 있기 때 문에 자료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측 자료에 의하면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 움직임은 3월 10일 밤, 청주농업학교 2년생 31 명이 교장에게 시험 연기원서를 제출하였고, 또 1학년생 15명이 이날 밤 비밀리에 기숙사를 탈 출한 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이를 서울에서 내려온 자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고 엄중히 경계하였다. 35) 이는 3월 2일 청주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 다. 청주의 만세운동 분위기는 이튿날까지 지속되었으나, 36) 만세운동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31 이 통계에는 참가자 수가 463,068명이고 시위군중의 사상자도 1,199명에 불과하다고 되어 있어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의 참가자 수 2,023,098명, 사망 7,509명, 피상 15,961명과 큰 격차를 보인다. 32 「陸軍省發表の損害內譯數訂正方に關する件」(1920. 1. 4, 朝鮮憲兵隊司令官 兒島惣次郞)(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 Ⅰ卷, 253쪽의 「騷擾箇所及死傷一覽表」). 33 《獨立新聞》, 1919년 9월 2일자. 3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제3권, 79쪽. 35 高第六七○五號, 1919. 3. 11, 「極秘 獨立運動に關する件(第十二報)」(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Ⅰ卷, 350쪽). 36 朝鮮總督府, 1919. 5. 10, 「騷擾事件報告臨時報第十二」(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第Ⅰ卷, 7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