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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34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신홍식이 태어난 곳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23-1 일대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 가옥 멸실 - 신홍식( 申洪植, 1872~1937)은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 協成神學校) 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平壤南 山峴敎會 )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에는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동지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으로부터 3·1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오화영( 吳華英)·정 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 등과 서울을 포함한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키로 협의하고, 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신석구(申錫九) 등 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 하였다. 28일 에는 재동에 있는 손병희( 孫秉熙)의 집에 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홍식 생가는 2008년 조사에서 신춘식 氏 (인차리 148-3번지 거주, 당시 77세)가 가덕면 인 차리 155-4번지 컨테이너 집을 신홍식이 살았던 곳이라고 증언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하지 만 신홍식의 제적등본에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 25번지로 되어 있고, 일제의 심문에 답하며 자신의 출생지를 문의군 동면 대일리( 垈一里)로 진술한 바 있다. 따라서 신홍식 생가의 위치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신홍식 생가 터 3·1운동 0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