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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30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신석구가 태어난 곳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 588-2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 개동 가옥 멸실 - 신석구( 申錫九, 1875.5.3~1950.10.10)의 본관은 평산(平山 )이고, 호는 은재(殷渽)이다. 그는 청원군 미원면 개동(미원면 금관리)에서 아버지 신재기와 어머니 청해 이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많은 방황의 시절을 보내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왕영덕( 王永德)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서울 협성신학교( 協成神學校)에 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 수표 교 교 회에서 재임하던 1919년 2월 중 순경, 오 화영( 吳華英)으로부터 3·1운동에 관 한 계획을 듣고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해 2월 28일, 그는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 회합에 참여하였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일제에 피체된 그는 의연하게 법정투쟁을 전개하였으나,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 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되어 투옥되었 고,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 戰勝祈願禮拜 )를 거부하다가 감금당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3·1절 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基督敎民主黨) 비밀 결사사건 등 으로 투옥되었고,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검 거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 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석구 생가의 위치는 2008년 조사에서 박동석(당시 금관 3리 이장)이 금관 3리 갯골 586번 지 여도현氏가 거주하는 곳이 신석구의 생가 터라고 증언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한편 2016 년 독립운동가 신석구 선생 기념사원으로 생가 터에 대한 일부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신석구 생가 터 3·1운동 0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