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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 유적 기초조사 보고서 226 • 정의 • 현재주소 • 당시주소 • 종류 • 현재상태 • 지정사항 독립운동가 손병희가 태어난 곳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385-2 충청북도 청주군 산외이면 대주리 가옥 복원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현충시설(의암 손병희선생 유허지) 손병희( 孫秉熙, 1861.4.8~1922.5.9)의 호는 의암( 義菴 )이고, 북이면 금암리 대주에서 아버지 손두흥( 孫斗興)과 어머니 최씨( 崔氏 )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 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관군과 싸웠으며, 1897년에는 동학 의 3대 교조가 되었다.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 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 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吳世昌)·박영효(朴泳孝 )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하여 두 차례에 걸쳐 유능한 청년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 ( 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 進步會 )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 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게 단발령( 斷髮令 )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 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1월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용구 등 천도교단내 친일파를 제거하고 교세의 확장에 노력하였으며, 교육사업과 언론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08년에는 교조 자리를 박인호( 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하며 수 도에 힘썼다. 1919년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으로 사망 하였다.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를 설치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희 생가는 1971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었으며,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 一 ’자 형 초가집 형태이다. 하지만 복원과정에서 원래의 구조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임이 알려져 이 에 손병희 생가 3·1운동 01-32